#월간안전가옥
*회사에서 한 달에 한 번, 한 달을 돌아보는 글을 써서 블로그에 공개한다. 여기에 다시 포스팅하면서 눈에 거슬리는 표현들은 조금 수정했다.
저에게 올해 11월은 언제 다 갔나 싶게 짧았습니다. 짧게 느껴진 데에는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추방을 다녀오느라 3주만 출근했다는 것도 큰 이유일 것 같아요. 아마 지금 제가 쓴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이라면.. 안전가옥의 ‘추방' 제도에 대해서도 다른 운영 멤버의 글을 통해 이미 들어보신 적이 있겠지요. 안전가옥의 ‘추방’은 주 4일을 일하는 멤버라면 4일, 5일 일하는 멤버는 5일을 연이어 쉬어서 1주일 내내 쉬고야 말아야 하는 안전가옥의 휴가 제도입니다. 끊어 쓸 수 없고, 4개월에 한 번 씩 지급됩니다. 그러니까 1년에 3번, 3주의 추방이 생기는 것이죠.
저는 사실 휴가가 그렇게 많지 않았던 신입사원 시절부터 있는 휴가를 싹싹 긁어 모아 1주일씩 여행을 떠나는 것이 낙이었기 때문에 안전가옥의 추방 제도는 너무나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안전가옥에 와서 주 4일 근무를 하면서, 길어진 하루의 근무시간 때문에 체력이 바닥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았는데 1주일 씩의 휴가는 리프레시하기에 나름 충분한 기간이더라고요.
아무튼 그렇게 올해 세 번째 추방 기간이 돌아왔습니다. 바쁘게 보낸 10월, 11월을 생각하며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추방의 원래 의미에 맞게! 휴식하고! 리프레시! 하기 위해서 제주로 떠났습니다. 원래 제가 제주에 갈 때마다 찾는 숙소와 익숙한 카페들은 거의 다 서쪽 협재, 한림에 있는데요. 이번에는 혼자, 조용히, 멍하니, 앉아있어 보려고 일부러 동쪽으로 갔습니다.
홀로-여행자에게 찰떡인 플레이스캠프에 머물면서 느긋하고 느긋하게 보냈습니다. 저는 어차피 운전면허도 없기 때문에, 걸을 수 있을 만큼 걷고, 먼 곳은 버스로 30분 내에 갈 수 있는 곳만 가고, 하루에는 한 가지 목표만 세우고 실행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첫째 날에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방어를 사다가, 펭수 입덕 영상을 보면서 먹었고요. 둘째 날에는 김영갑 갤러리를 갔다가, 고기국수를 먹고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와 아이패드 드로잉 클래스를 들으며 펭수 그림을 그렸습니다. 셋째 날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우도에 가서 우도봉에 올라갔다가, 점심엔 바쁘게 고기를 먹고 숙소로 돌아와 펭수 영상을 잠깐 보았어요. 그리고 밤의 섭지코지를 걷는 야간 산책 코스에 갔습니다. 넷째 날엔 성산포 성당에서 아침 미사를 드리고, 동네 분식집에서 ‘정식'을 먹고 송당리에 가서 커피를 두 잔 마셨습니다. 저녁은 방어회와 귤을 사다가 펭수의 엣헴송 리믹스를 들으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요.
간추린 게 아니라 정말 이게 다였어요. 일어나서, 밥 먹고, (펭수보고) 커피 마시고, 걷다가, 밥 먹고, (펭수보고), 자고 (펭수 꿈꾸고). 평소에 제가 하던 여행에 비하면 0.6 정도만 채운 일정이었지만, 비운만큼 채워지는 것도 있더라고요. 바짝바짝 저렸던 왼손 끝의 통증도 없어졌고, 미래에 대한 과도한 고민도 좀 덜어졌거든요. 다 잘할 순 없으니까요. 펭수도 달리기는 쪼금 느립니다. 하나 잘 못한다고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잘하는 게 분명히 있을 테니까 그걸 더 잘하면 되니까요.
휴가는 이렇게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 삶의 원칙들을 바쁜 일상에서 잘 느끼지 못할 때, 그게 다 패배자의 변명으로 느껴질 때 꼭 필요한 것 같아요. 곧 다가올 연말 휴가도, 올 한 해를 돌아보면서 먼지 쌓인 나의 원칙과 신념을 마른 수건으로 깨끗이 닦는 시간으로 보내야겠습니다. 모두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