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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온 Aug 17. 2022

전세살이 살아남기 - 결말



내용증명이 왔다는 연락은 처음이라 무조건 당장 빨리 받아야하는 건줄 알고 심지어 우체국까지 찾아가서 받고 보니 집주인인걸 알았을 때. 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직장에 양해를 구해가며 도착했던 우체국에서 허망함과 화가 온몸을 지배했다. 그 기운을 모아 까보기도 전부터 구글에서 내용증명 답변 쓰는 법을 검색하고, 변호사 친구에게 연락해 대응 방법을 고민하고, 결전의 심정으로 서류 봉투를 뜯었다.



참 구구절절했다. 

몇달에 걸친 싸움 아닌 싸움을 시간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가며 본인의 심정과 함께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이런 일기같은 공식 문서는 처음이었다. 

내용증명에 있는 주소를 조회해보니 월세를 내고 있다는 서른 넘은 '우리 애'는 경북을 주소로한 아버지 명의의 서울 집에 살고 계셨다. 처음 내게 1억을 올려주지 않으면 나가라 고 했던 통화를 녹음하지 못한걸 후회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내용증명에 그대로 적혀있어서 차라리 고맙기까지 했다.


변호사 친구는 답변을 당장 해야하는 건 아니니 일단 좀 며칠 쉬면서 생각해보라고 했고, 나는 몇달 전에 미리 예약해뒀던 여행을 떠났다. 허탈했다. 1억이 뭐길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여행 둘째날, 집주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갱신청구권 사용 및 보증금 5% 인상에 합의하겠다고. 약 한달 뒤 계약 종료를 일주일 앞두고 우리는 증액 계약서를 썼다. 

나름 시시한 종말이었다. 

갑자기 왜 생각을 고쳐먹은 건지는 모르겠다. 내용증명을 보내고서야 변호사에게 간건가? 아님 그쪽도 1억이 뭐길래 싶었던 걸까?


그리고 드디어 그 집에서 벗어났다. 

다행히 계약 종료 몇달 전 다른 집과 다른 집에 들어갈 돈을 마련해 우리는 한달 정도 일찍 이사를 나갔다. 내가 집을 조금 일찍 빼고 싶다니 안된다고, 그럴거면 새로운 세입자를 내가 알아보라더니 (솔직히 계약 전후로 한달정도는 서로 양해하는 기간이 아닌가?) 내가 이사 나간걸 알자 도배하고 싶으니 미리 공사해도 되냐고 하던. 그리고 보증금을 돌려받던 날에는 내가 정산하러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배 사장님이 먼저 와서 벽지 뜯고 있던. 

그 집과, 그 사람들과 이제 영원히 안녕이다.


 

그래도 그 집, 그 동네 참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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