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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온 Aug 09. 2023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그 당시엔 나를 주정뱅이로 만들었던 그에 대하여.


미친 상사 H를 견디며 나는 부쩍 A를 생각한다.

그는 매일 야근하면서도 웃고 있는게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가 나를 기존의 팀에서 빼올 때 했던 말이다.  

기존의 팀에서 야근을 하면서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웃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어서였다. 그니까 야근을 하면서도 행복할만큼 일을 사랑했던건 아니고, 그냥 야근을 해야하는 K-직장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던 것이었다. 여튼 이 얘기는 차치하고.


나는 야근을 덜 할 것 같아 그 팀으로 냉큼 갔다. 그 팀장이 야근하는 날 봤다는 자체가 그 팀의 야근을 말해주는걸 모르고. 아주 어리석었지.

 

그는 소리를 자주 질렀다. 나는 그간 사무실에서 소리를 지르고 종이를 던지는 일은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일인줄 알았다. 드라마보다 항상 현실이 더한 것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도 자주 뱉었다. 같은 사무실에 있었는데 그 전까지 눈치채지 못한 스스로의 무관심이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영업팀이었던 그 팀은 신생업체다운 어마무시한 매출 압박을 받으며 매일을 살얼음판을 걸었다. 나는 매일의 실적을 취합하고 팀장에게 보고했는데, 매일매일 동료를 팀장에게 팔아넘기는 기분이거나 나 스스로를 팔아넘기는 기분이었다. 월마감을 할 때쯤엔 곡소리가 났다. 팀원 중 적어도 한명, 혹은 우리팀 전체가 팀장의 소리에 깔렸다.



엄청나게 더운 여름날이었다. 나는 마감을 위해 주말에 회사에 나와있었다. 부팀장과 두명의 영업사원이 함께 사무실에 있었다. 오전 내내 보고서를 작성하고 팀장에게 전자 결제를 올리고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옥상에서 뜨끈한 햇빛을 받으며 노가리를 까고 있었다. 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팀장은 전화를 안 받는 것을 몹시 싫어해 한평생 무음이었던 내 휴대폰에서도 이 팀장 번호만큼은 진동과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팀장님을 끝내기도 전에 팀장은 소리를 질렀다. 이유가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회사에서 울어본건 처음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밝은 대낮에 공개된 장소에서 울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다행인건 고함에도 적응이 된다는 것이었다. 

옥상에서 펑펑 울고난 이후엔 인쇄를 하는데 7만부로 결재 받아서 진행했는데, 왜 7천부가 아니냐, 너 미친거 아니냐 소리를 지르는데도 팀장님이 결재하셨잖아요 라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물론 뒤에서는 넋이 나간 영혼이 있었다)



아이러니한건, 팀장이 이상하면 팀원들이 보통 좋다는 것이다. 혹은 이상한만큼 좋다는 것. 팀장이라는 공공의 적이 있어 서로를 탓할 필요가 없어서였을까? 우리는 같이 야근을 하고 자주 술을 마셨다. 영업을 핑계로 회식비로 술을 마시기도 했다. 일품진로며 화요며 온갖 고량주에 중국음식부터 일식집까지. 술자리가 늦게 시작한만큼 늦게 끝났다. 상사를 욕하며 시작된 자리는 온갖 신변잡기를 떠들다 술이 내가 되고서야 끝났다. 새벽 세네시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엔 일곱시에 일어나 팀장회의를 위해 출근했다. 


그래도 결국 그 팀에서는 몇개월만에 도망치듯 다른 TF에 합류하며 팀을 떠났다. 그의 분노를 계속 받고 있다간 내가 그런 인간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그 회사를 다니는 동안 가장 잘 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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