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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온 Aug 11. 2023

... 여름이었다




나는 회사를 사랑한다고 철석같이 믿었고, 어쩌면 그 철석같은 순간 사이사이 틈에 회사를 진짜로 사랑하기도 했다.



회사에서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면 한달내내 야근하던 시절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나는 그때 TF에 차출되어 다른 6명의 팀원들과 함께 건물 구석에 창문 하나 없이 하얀 벽으로 둘러쌓인 임시 사무실에 있었다. 우리는 6주 뒤까지 300페이지정도가 되는 제안서를 써야했다. 예전 자료를 참고하여 목차를 만들고, 각자의 업무를 나눴다. 프로젝트 총 책임자는 A2 사이즈로 촘촘한 일정이 담긴 달력을 만들어서 모두에게 나눠줬다. 우리는 그 일정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았다. 다음주 월요일까지는 초안이 나와야해, 디자이너 미팅은 이때 해야하고, 디자인 초안은 이때 나와야하고. 임원진 리뷰는 이때랑 이때야. 인쇄는 이때 들어갈거니까 적어도 2일전에는 최종본을 회사 프린터로 인쇄해보자. 오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내용을 끊임없이 바꾸고, 정 안되는건 디자인으로 버무리고. 


일정표는 제법 합리적이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며 채워내는 300장은 만만하지 않았다. 우리는 빠르게 야근에 돌입했다. 오늘 야근하면 내일은 하지 않을거야, 오늘 야근하면 주말엔 쉴 수 있겠지. 우리의 희망은 빠르게 헛된 기대로 대체되었고, 7명 중 평균 6명이 밤 12시가 되어도 사무실에 남아있게 되었다. 어제 쉬고온 얘는 오늘 야근을 하고, 5일 내내 야근한 애는 못 버티겠다며 스트레스 풀러 술 마시러 가고. 뭐 그런 식이었다. 머리를 못 감고 오는 날엔 미용실에 가서 머리 손질을 하기도 하고, 피곤한 날엔 클리닉에 가서 링겔을 맞았다. 커피는 회사의 법인카드와 누군가의 개인카드들로 끊임없이 공급되었다. 


유일하게 모두가 야근하지 않는 날은 임원 리뷰 전날이었다. 리뷰는 보통 금요일에 이뤄졌으니 목요일 이른 오후 그동안 만든 것들은 전부 A2에 인쇄해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 프로젝트 총 책임자가 들고 간다. 그럼 우리도 집에 갔다. 그리고 금요일에 나와서 커피를 나눠마시며 여유롭게 일을 하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토요일에 나왔다. 그러면 책임자는 리뷰 결과를 들고, 임원은 간식을 사들고 왔다. 


사무실은 엄청나게 큰 건물의 부속건물에 있었는데, 그 건물은 저녁 10시가 넘으면 대부분의 출입구를 닫았다. 10시가 넘으면 닫히는 출입구가 70%, 11시가 넘으면 닫는 곳이 또 몇군데, 12시가 넘으면 미로찾기처럼 층을 구불구불 돌아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자주 길을 잃었고, 서로를 늦은 밤 불이 모두 꺼진 음산한 빌딩에서 구해내며 친해졌다. 


...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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