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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온 Aug 17. 2023

그해, 밀라노



이탈리아엔 가봤지만 밀라노는 처음이었다. 유럽의 셀 수 없이 유명한 도시들 중에서 밀라노는 그저 그런,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대성당,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목적하지 않는 여행객들에겐 언제나 후순위로 밀리는 그런 도시. 로마도 피렌체도 베니스도 나폴리도 아닌. 하지만 패션위크가 열리는. 이탈리아 최대의 공업도시. 도시에 내리기 전에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게 다였다. 그래서 은연 중엔 삭막한 서울 같은 곳을 생각했다. 


밀라노에서 가장 큰 기차역에 27키로 이민 가방과 10키로 캐리어와 배낭을 지고 내렸는데 너무 더웠다. 나는 얇은 긴팔 셔츠에 레깅스를 입고, 트렌치 코트를 들고 있었는데,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났다. 선글라스를 껴도 눈이 부셨다. 어느 평일의 밀라노는 북적거렸고, 나는 구글맵을 키고 한참이나 길을 헤맨 끝에 호텔에 기진맥진하여 도착했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로 다이빙, 하면 좋겠지만 나는 밥을 먹어야 했고 집을 구해야했다. 


길었던 환승, 이코노미석에서의 찌뿌둥한 비행, 짐가방을 끌고 한참 걷기까지. 온몸에 쌓인 피로는 두오모 역에서 나오자마자 마주한 두오모 앞에 의미를 잃었다. 두오모역의 출구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순간 파아란 하늘 아래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하얀 대리석의 건물이 뽀얗게 빛났다. 우윳빛깔이라는 말은 이 건물을 위해 준비된 말이었다. 삭막이라니. 헛된 생각을 했던 뇌세포를 꺼내 이 광경을 보여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 도시는 삭막이라는 단어와는 만리쯤 떨어져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도시와 단숨에 사랑에 빠져들었다.


학교는 두오모역에서 걸어서 십분쯤 걸렸다. 학교랑 더 가까운 다른 역도 있었지만, 나는 자주 두오모역에 내려 학교에 걸어갔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도 할일이 없으면 두오모에 갔다. 두오모에서 두세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약속이 있어도, 두오모를 보고 걸어 갔다. 아침 여덟시의 두오모, 한낮의 두오모, 해가 질 때의 두오모, 비 오는 날의 두오모, 마치 두오모에 첫사랑이라도 남겨둔 사람처럼. 



열정과 냉정 사이의 피렌체 두오모가 있다면 나에겐 밀라노 두오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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