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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온 Aug 30. 2023

스스로 충만한 삶



부지런히 두오모를 오가며 매일매일 학교에 다니고, 그림을 그렸다. 나는 거의 모든 평일에 밤에 늦게까지 그림을 그렸다. 주중에 열심히 그리고 주말엔 놀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매일 매일 아무리 그려도 내가 그리는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기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날 선생님이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너에겐 문제가 있어.” 

“너는 니가 미켈란젤로라도 되길 바라는 것 같아. 니가 한달 전에 그린 그림을 봐. 너는 네가 나아지고 있다는걸 알아야해. 하루아침에 미켈란젤로가 되지 못한다고 좌절할 게 아니라” 


그 말을 듣고 며칠 뒤, 나는 두오모를 향해 걸어가다 어떤 성당에 우연히 들어가 앉았다.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갑자기 엉엉 울었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지쳐서. 내가 더 잘하지 못하는 것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일까봐 두려워서. 최선이라는 단어는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서. 



성당에 가서 운다고 뭐가 대단하게 바뀌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에도 나의 일상은 똑같았다. 나는 이탈리아 할머니의 집에 다른 한국인 언니와 함께 살았다. 우리는 각자의 방을 쓰고, 부엌과 화장실을 함께 썼다. 늦잠을 자는 집주인 할머니와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온 한국인 언니 사이에서 시작하는 조용한 아침. 빨간색 지하철을 타고 두오모역에 내리면 커피와 빵을 파는 바가 있었다. 나는 에스프레소와 잼이 들어간 크로아상을 사먹거나, 에스프레소 콘 파나를 마시곤 했다. 부산한 도시를 커다란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그림을 그렸다. 점심에는 근처 피자집에 가서 두툼한 피자 한조각을 먹거나 가끔은 친구들과 바에 가서 파니니를 사먹곤 했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와서 간단하게 파스타를 해먹고. 가끔 일찍 끝나는 날엔 마켓이 서는 곳에 가서 올리브를 사오고. 친구가 사는 집에 가서 같이 그림을 그리며 와인을 마시거나, 인터넷으로 알게 된 한국인 언니네 집에 놀러가 한식을 해먹기도 하면서. 그리고 새벽 두세시까지 계속 그림을 그렸다. 새벽 늦게까지 깨어있다보면 한국의 가족들이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나는 언니들과 밀린 수다를 떨다가 한두시간 더 늦게 자곤 했다. 



다만 더 이상 최선이니 최고니 하는 단어를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서 지금 당장 최고가 되지 못하는 너, 한심해 하는 것을 그만두게 됐다. 대신에 고요한 시간에 혼자 그림 그리는 시간을 시간을 기꺼워했다. 해가 지고도 한참, 모든 것이 조용한 곳에서 불을 켜고 종이를 스치는 연필의 소리, 지우고 다시 쓰는 과정에의 온전한 몰입. 

누구를 위해서도, 무엇을 위해서도, 무엇이 되기 위해서도 아닌 스스로가 즐거워서 하는 일. 나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해 8000km를 날아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채우는 일의 느낌은 고요히 내 일상을 점령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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