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밀라노에 간다고 했을때 누군가는 회사생활 권태기라 했다. 누군가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고 했다. 누군가는 부럽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 선배와 한강에서 만난 날, 그는 마피아와 사랑에 빠질지도 모르지. 니 앞에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불확실성이 재밌겠다 했다. 낭만을 얘기하는 그는 시인이 꿈이었고 매일 밤을 새며 일하는 직장인이었다.
마피아와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마피아같은 사람들은 나같은 합법 비자로 들어와 학교에 다니는 표준적인 삶에서 만나기 쉬운 존재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피아는 당연히 드라마 빈센조의 송중기처럼 낭만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마피아 얘기를 하면 이태리 현지인들은 한국에서 '나 조폭과 만나보고 싶어'라고 했을때 내 친구들이 보였을만한 그런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들은 인간을 사고 팔고, 고무를 넣은 가짜 올리브유를 만들고, 유럽으로 마약을 유통했다. 그래도 마피아가 시작된 시칠리아는 아름다웠다. 3대 미항이라던 나폴리는 유럽 마약의 관문이라는 말 그대로 별로였지만.
엄청나게 특별한 모험같은 건 펼쳐지지 않았다. 나는 밀라노, 181제곱미터, 서울의 30%도 안되는 크기의 작은 도시에서 안온했다. 가끔 인종차별주의자들을 길에서 만나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길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포르노를 찍자는데 욕하지 못하고 놀라 도망친게 모험이라면 모험이었겠지.
나름의 목표가 있는 공부였지만, 무엇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느라 손에 굳은 살이 아무리 배겨도, 색칠용 마카를 매일 다쓰고 매일 새로 사도,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은 아마 진작에 알았다. 이걸 해서 뭐가 되어야지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저 하루하루 스스로 충만해서 아름다웠다. 어떻게 하면 이 선을 조금 더 잘 그릴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걱정 대신, 뭔가를 이뤄야겠다는 염원 대신 나는 내 손에 들려있는 색연필만 생각했다.
햇빛이 비추는 탁자에 앉아 가위질을 하던 순간, 밤이 새도록 그림을 그리느라 종이로 뒤덮였던 나무 책상. 충만한 일상이 당연해진 날에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