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하며 역시나 뭐라도 되지 않겠구나, 엄마 말이 맞았군. 재능이 있었다면 진작에 꽃피진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라도 티가 났어야 했던거지. 뭐 그래도 괜찮아 하는 것도 하루이틀. 재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건 아주 약간 쓰라렸지만 괜찮았다. 세상에 빛나는 재능은 많았고, 이 재능이 아니면 다른 재능이 있겠지. 하고 느슨하게 생각 할 수 있었다.
그보다 심각한 당장의 문제는 생계였다. 나는 부자가 아니었다. 몇년간 해외에서 공부를 핑계로 떠도는 사람들의 생활은 나의 현실과는 대충 이억광년쯤 떨어져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소비를 줄일 수 있는 사람이냐 하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나는 관심 없는데는 단 한푼도 충동적으로 사용하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는 아낌없이 쓰는 편인데다 좋아하는 것이 아주 많았다. 게다가 이탈리아를 오면서는 돈 생각하느라 경험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다짐마저 했다.
이탈리아에는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게 참 많았다.
일단 와인. 주류를 수입할 때 내는 세금이 40%가 넘어가는 생각하면 이탈리아에서 먹는 이탈리아 와인은 너무나 저렴했다. 나는 비싼 병으 자주 사진 않았지만 시시때때로 아끼지 않고 술을 마셨다. 집에서는 슈퍼마켓에서 파는 2-3유로 와인을 혼자 홀짝이며 밤을 지샜고, 친구들과는 식당이나 바에 가서 와인 없이 나오는 날이 없었다. 친구들과 베니스에 갔을 때는 에어비앤비에서 와인 따개를 찾지 못해 사온 와인을 못 마시게 되자, 와인병을 벽과 신발 바닥에 한시간 동안 내리친 끝에 오픈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 다음은 여행. 몇년전에 이탈리아를 여행한 이후로 이탈리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라가 됐다. 사랑하는 로마를 비롯해 도시 국가로 오래 남았던 이탈리아는 각 지역별 특색이 뚜렸했고 나는 그 지방 하나하나를 다 가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성을 개조해 만든 고성호텔들과 와이너리를 가진 아그리투리스모- 숙박의 종류도 어찌나 다양한지. 이탈리아 중부에서 묶었던 고성 호텔은 로마에서 쉐프가 주말이면 와서 트러플이 올라간 스테이크를 비롯한 음식들을 선보였다. 여기에 와인이 함께 했음은 당연하고. 북부로 올라가면 스위스와 국경을 맞댄 호수들이 즐비하고 조금만 더 가면 알프스고. 여름엔 남쪽으로 겨울엔 돌로미티로 그야말로 여행자들의 천국이었다.
그리고 각종 문화행사와 옷들. 기왕에 밀라노에 있으니 클래식엔 관심 없지만 라스칼라 라는 전통있는 공연장에도 가봐야겠고 새로운 브랜드와 스타일로 가득한 옷 쇼핑도 좀 해야겠고… 끝도 없었다. 물론 공부에 드는 부대비용도 말할 것 없었고. 종이며 펜이며 옷감이며.
이러다 보니 통장 잔고가 슬슬 바닥을 보였다. 1년간 학비, 생활비, 월세 등 필수 비용과 온갖 즐거움 비용을 쓰고나니 5년쯤 모은 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쓰는 속도는 왜 모으는 속도의 제곱인건지. 마음의 평안은 통장 잔고에서 온다고 했던가. 나는 슬슬 쪼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냥 다시 취업하기로 했다. 아니 일단 취업하기로 했다.
나는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1년 몸과 마음을 다해 공부한 것보다 대학 4년을 배우고 회사에서 5년 넘게 구른 경험이 더 큰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듯 혹은 나의 재능은 여기에 있다고 말해주듯이
나는 약 2개월만에 사무직으로 해외 취업에 성공했다.
꽤 그럴듯한 기업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