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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온 Oct 05. 2023

후지다, 후져



다른 마음으로 회사와 일을 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타트업을 골랐다니?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자, 나여라.




후지다 후져, 그해 나는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새로운 일을 구하고 있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싶었다. 선명하게 보이는 유리천장이 없는 곳에서, 소리지르는 팀장을 묵인하지 않는 곳에서 새롭고 산뜻하게 시작하고 싶었다. 


선릉역 9번 출구에서 100미터. 반짝이는 빌딩 숲에 있는 공유 오피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 2층엔 고급 커피 머신과 우리 집 쇼파보다 비쌀게 확실한 가죽 쇼파가 놓여있었고, 한쪽 창은 햇빛이 가득채웠다. 직원이 나와 나를 회의실로 안내했고, 나는 내 또래로 보이는 대표와 마케팅 팀장과 한시간 가량 화기애애한 면접을 봤다. 그리고 그 회의실 문을 닫고 나오며 그 회사로 가는 문을 닫았다. 아무리 급해도 똥 된장은 가려야지. 

그 면접은 업무로 시작해 개인사로 끝났다. 우리가 한참 나의 경력을 얘기하다가, 그들은 나에 임신과 출산 계획을 물었다. 인터넷에서 많이 봤다. 면접에 갔더니 임신 계획을 물었다는 소리는. 다만 그게 나에게 벌어질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뿐이지. 그것도 나와 또래의 스타트업 대표 입에서 나올 줄은 더더욱 몰랐고. 후지다 후져



이후 몇번의 면접을 지나고, 두명의 여성이 하는 회사에 입사했다. 둘다 아이를 양육하는 워킹맘이었다.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는 나에게, 그래도 아이를 가져서 얻는 행복에 대해 얘기를 하기에 괜찮으려니 했다. 반년쯤 지났을까. 회사는 성범죄자를 아무렇지 않아 했다. 차별에 대해 재밌다고 여겼다. 회사는 사회운동을 하는 곳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럴 필요까진 없지 않나. 다른 사람도, 다른 방법도 언제나 있었고 대표도 나도 그걸 알았다. 그냥 회사는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겼다. 후지다 후져. 



또 다시 이직을 했다. 또 다시 두명의 여성이 하는 회사였다. 둘다 결혼을 했고, 한명은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직원의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했다. 분기마다 매니저와 성장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스스로 목표를 정하며 나아간다 했다. 몇번의 계절이 지나자 나의 매니저는 나의 성장에 두가지 길을 제시하며, 그 중 한 방향을 가르켜 임신 출산 육아 계획이 있다면 나쁘지 않다고 했다. 하나는 임/출/육을 하기 좋은 삶, 하나는 그렇지 않은 삶. 남자 직원에게 부인이 임신을 한다면 그것은 출산 휴가를 10일 제공하고, 그 이후엔 사생활로 취급할텐데, 나에게 임신과 출산과 육아가 생긴다면 그것은 내 커리어의 중대한 결정이 되어야한다고 하는 매니저 앞에서 나는 물어보고 싶었다. 똑같은 얘기를 곧 아이가 태어난다는 남자 동료에게도 했냐고. 거긴 이제 출산 직전이라는데, 그 동료에게도 두가지 길을 제시했나요? 제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출산을 생각하지 않다고 한건 잊으셨나요?

차별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신입 남자 직원에게는 잡일도 안 시킨다는 사람이 왜 근로 계약서 밖 나의 인생이 왜 내 회사 생활에 영향을 미쳐야한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 미칠 수 있다고 치자. 근데 그걸 선제적으로 본인이 제시하게된 그 밑바탕에는 뭐가 있을까? 질문들에 오래 사로잡혔다. 

임신 출산 육아 계획이 있으면 이 길도 나쁘지 않다고?



참 후졌다.




하지만 결국

새로운 곳을 찾고 찾아도 계속 맴도는 것 같아, 결국 내가 제일 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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