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직한지 반년이 되었을 무렵, 회사에 새로운 ㄱ이 입사를 했다. ㄱ은 나와 비슷한 연차, 우리의 업무는 달랐지만 뗄레야 뗄 수 없는 업무를 각각 담당하고 있었다. 나의 상사 ㅁ은 ㄱ을 처음부터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다. 상사 ㅁ은 호불호가 굉장히 뚜렷하고, 호오를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ㅁ은 ㄱ이 입사한 이후, ㄱ이 하는 모든 말에 일일이 반응을 하고, 대단하다, 잘한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고객을 사랑한다며 끊임없는 칭찬을 늘어놨다. 그리고 그 옆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나는 서서히 다시 부적응의 상태로 접어들었다. 왜냐하면 ㄱ이 개입하기만 하면 내 일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ㄱ은 오지랖이 넓은 건지, 그것이 진짜 자신의 일 혹은 권리라고 믿어서인지 청하지 않은 많은 곳에 등장해 훈수를 뒀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1년차 신입과 비슷한 정도의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나의 상사이자 ㄱ의 상사인 ㅁ이 온갖 곳에서 ㄱ이 얼마나 훌륭한지, 본인이 ㄱ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떠들어대고 있었기 때문에 ㄱ의 말을 무작정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진짜 문제였다. 어느새 나는 ㄱ이 말 한스푼 얹을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갖은 방법을 쓰며 일하기 시작했다.
사건은 평가 시즌에 터졌다. ㄱ이 나의 동료 평가에 얼토당토 하지 않은 얘기를 적어놓은 것이다. 목요일 오후에 나는 그 평가를 확인한 후 분노에 찼다. 그리고 이 것에 대해 ㅁ에게 얘기하기로 결심했다.
금요일 오전, ㅁ과 나는 평가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 위해 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저는 ㄱ이 저에게 쓴 내용 중 A에 대해 *** 라고 쓴 것은 부적절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ㄱ이 저에게 A에 대해 이런식으로 평가하는 게 허용되는 것이라면, 저는 더이상 A업무는 지속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ㅁ은 처음엔 당황하며 ㄱ이 그런 의도로 쓴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 내용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명쾌한 언어로 쓰여있었지만 나는 일단 알겠다고 했다) 곧 ㄱ이 그렇게 말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동의했다. 심지어는 ㄱ을 대신해 사과도 했다. 그런 의도로 읽게했다면 미안하다며. (ㅁ이 ㄱ을 대신해 사과하는 것도 이미 이상했다) 나 또한 사과했다. A 업무를 하는데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고, ㄱ이 한 얘기에 너무 격하게 반응 한 것 같다고. 어쨌거나 그 대화는 아주 화기애애하게, 우리 둘다 웃으며 끝났다.
그리고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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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은 주말에 나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한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니가 감히 나에게 업무가 싫다고 해? 감히 ㄱ이 한 말에 토를 달아? 정도가 되겠다.
그러니까 평화롭고 아름답게 끝냈다고 생각했던 대화는 주말 내 ㅁ의 머릿속에서 제 처지도 모르고 본인에게 개긴 직원과의 대화로 탈바꿈을 한 것었다. 그것도 모자라 ㅁ은 본인이 나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 수요일 오전, 나는 ㅁ과 친한 다른 상사인 ㄷ과 마주 앉았다. ㄷ은 나에게 그 말을 한 저의가 무엇이냐 물었다. 나는 입은 있는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떤 ‘저의’가 있어 그러지 않았으므로. 나는 나의 상사에게 나의 업무의 힘든 점에 대해 토로했을 뿐이었기에. ㄷ은 한시간이 넘도록 나를 붙잡고 왜 그랬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죄송하다 했다.
ㅁ은 더이상 나와 일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본인에게 내가 준 상처를 용서할 수 없다나. 이후 나는 모든 내가 하던 모든 주요 업무에서 배제되었다.
마치 로맨스 드라마의 비극적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얽히고 얽힌 오해 끝에 상처받고 결별하는 비련의 여주인공을 ㅁ이 차지해버렸기에 나는 바보같은 실수로 오해를 만든 한심한 남주인공이 되었다. 드라마에서는 남주인공들은 오해끝에 버려져도 별 탈 없이 살아가다가 여주인공이 돌아오면 적당한 사과를 건네고 해피헨딩에 골인하던데, 나는 계약서의 ‘을’인 관계로 별탈이 없지가 않았다. 나는 을 주제에 갑을 상처줬으니 이만하면 대단한건가 하다가도 대체 회사에서 왜 드라마를 찍어야하는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나중에 어렴풋이 누군가에게 듣기로는 ㅁ은 내가 납작업드려 죄송하다 빌기를 기대했다고 한다.
"미친"
며칠이 지나 내가 그 얘기를 친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다잡았을 때, 친구는 이 한마디로 명쾌하게 상황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