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는 컨트롤 프릭이다. 극단적으로는 영 마음대로 안된다면 마음을 고쳐먹기까지 한다. 어떻게든 내 세상이 내 통제하에, 내 맘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괴롭다.
나는 회사에서 모든 통제력을 상실했다. 그건 정말 나를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이건 하루아침에 아 그럼 회사에 관심을 두지 말고, 일을 소중히 여기지 말고, 여기서의 내 시간을 가치있게 만들려고 하지 말자, 라고 다짐한다고 해결되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30년이 넘게 일을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일 중 가장 가치있는 일이고, 성과를 내지 못하면 쓰레기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은 금이니까 아껴써야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이십사시간이라는 한정된 자원 중에 삼분의 일도 넘게 쓰는데 이 시간의 가치를 모두 포기하는 것은 한순간에 결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회사와 관련된 시간 외에 나머지 시간을 금같이 보내기로 했다. 회사에서 에너지를 아끼고, 그 아낀 에너지를 더 좋은데 쓰자. 나를 위해 쓰자. 주변의 모두가 그렇게 말했고, 나도 술을 마시거나 우울해하며 침대 속에 처박혀있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다는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했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새로운 취미를 시작했다.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내가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쓰는 것, 그건 내가 아주 잘 하는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곧, 그 모든 시간에 회사가 끼어들었다. 나머지 시간을 재밌게 채울 수록 내가 가치 없다고 정해버린 그 여덟시간이 내 인생에 얼마나 큰 부분인지 자꾸 더더욱 실감하게 되니까. 나는 똑같은 시간을 얼마나 행복하게 보람차게 쓸 수 있는지 안다. 일을 하면서 얼마나 즐겁게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는지 기억한다.
적당히 일해도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오는 안락한 삶 속에서 나는 미쳐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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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동안 머리 속에 자리잡아 새벽마다 나를 깨우던 돌덩이가 뱃속으로 내려갔다.
잠은 잘 수 있었지만 밥이 들어가지 않기 시작했다.
뭘 해야할지 모르겠는 게, 너무 힘들어요.
말을 함으로써 돌덩이가 밖으로 나왔다.
괴로움 다음에 찾아온 건 질문이었다. 내가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잘한다고 생각해왔던 일을 못한다고 하니 나는 그럼 내가 뭘 할 수 있지? 구직 사이트를 열어 채용 공고들을 눌러봤다. 이것도 저것도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돈을 버는 방법은 다양하다지만 나는 회사에서 임금 노동자로 돈을 버는 방법 밖에 알지 못해서 사무직으로 쓸모가 없다는 소리를 들은 나는 하루에 1센티씩 초라해지고 있었다. (이 말은 키가 170이 안되는 내게는 세상에 짖눌려 자존감이라는게 사라지기까지 6개월정도의 시간이 남았다는 걸 의미했다.)
주변사람들은 그렇게 힘들다면 회사를 관두고 천천히 생각해보는 것은 어떻겠냐 했다. 아마 나도 남의 일이라면, 아니면 지금의 내가 아니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세상에 회사는 널리고 널렸다. 회사는 인생에서 네가 맘대로 바꿀 수 있는 몇 안되는 것 중 하나다.” 극도로 침울한 나는 평소와 같이, 뭐든 잘할 수 있지, 봐 20대 후반에 회사 때려치고도 다시 돌아와서 일하잖아, 하는 답을 낚아올릴 수 없었다. 몇번의 이직을 한, 퇴사 후 전공과 상관 없는 유학을 갔다온, 30대 중반의 여자 앞에 열려있는 문이 몇개일지 나는 감히 세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잘하는 것만 하면서 살 수 없죠.
그래서 이 말이 위로가 됐다. 그 일을 잘 못해도 살 수 있다.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듯이, 잘하는 것만 하면서도 살 수 없다. 어쩌면 이것도 너무나 당연한 명제였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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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답은 찾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은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력서는 업데이트 했고, 채용공고에 뭐 될 일은 되겠지, 하는 마음을 조금은 담고 지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