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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온 Oct 08. 2023

조용한 근로



2022년 겨울엔 조용한 사직 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처음 들었을 땐 코로나 시기였기에 코로나로 인해 떠들썩한 환송회 없이 퇴직하는 것인가 했다. 실제로 나도 코로나가 한 창일때 퇴사하게 되었는데, 마지막 근무일을 남겨두고 회사에 확진자가 나와서 모두가 정신없이 재택근무로 전환해 회사 동료들과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퇴사를 했었기 때문이다.

조용한 사직이 ‘주어진 일 이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만둔 상태’ 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주어진 일 이상을 해야하나…? 조용한 사직을 다룬 기사에서는 미국에서 시작된 이 해시태그가 한국의 소위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유행하고 있고, 그 유행이 결국 해롭다고 결론지며, 주어진 일 이상을 하지 않고, 회사에 사랑과 충성을 다하지 않는 세태를 고발하는 것으로 광고주에게 부응했다.


이 유행은 회사와 나의 관계를 (또다시) 돌아보게 했다. 그간 나와 회사의 관계는 뭐였을까?

서류를 낸다, 면접을 본다, 회사는 나에게 연봉을 비롯한 근로 조건을 제안하고, 나는 그것을 수락함으로써 우리는 관계지어 진다. 그 모든 과정에서 회사는 이 사람이 이 곳에 적합한지, 얼마나 일을 잘 수행할지, 근로자를 지망하는 사람은 이 회사가 다닐만 할지 평가하고, 더 나은 조건, 더 나은 상대가 있는지 탐색한다. 그 모든 지나한 과정 끝에, 우리는 계약서에 날인한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는 제법 명확하다.  


주어진 일을 하고 합의된 만큼의 책임을 지는 대가로 월별로 돈을 받고, 명절에는 선물 따위를 받는 것.  


그러나 2022년 겨울엔 이걸 ‘사직’ 이라 불렀다. 이것은 얼마나 뻔뻔한지, 그리고 “을”로써 계약서에 싸인한 나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갑“은 ”을“들이 계약 조건을 눈치채자, 그간의 그럴싸한 포장이 깨지자 이제와서 사직 운운하며 회사에서의 헌신을 당연한 만들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사직 상태로 계약 위반 상태로 만들었다. 본인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나를.


그래서 나는 내 맘대로 조용한 근로 라는 말을 만든다.


지난 5월 상사가 그랬다. ‘자기와 같은 마음으로 밤낮없이 고민해달라’고. 유감입니다. 당신은 회사의 대주주이자 경영진이고 나는 근로계약의 ”을“. 우리 계약 대로 갑시다, 나는 조용한 근로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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