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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온 Apr 12. 2020

과도기의 옷장

꾸밈 노동을 그만둬야 하는 결정적 이유


요즘 읽고 있는 '소비의 역사'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코르셋으로 조인 허리, 우아하지만 커다란 모자, 치렁치렁한 드레스, 하이힐, 희고 작은 손과 발은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다.'

18세기, 19세기 유럽의 장면을 설명하기 위한 문장이지만, 오늘날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이힐 대신 굽 낮은 단화를, 펜슬 스커트 대신 슬랙스를 입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성공한 커리어 우먼으로 묘사되는 대부분의 여성 캐릭터들은 힐을 신고, 허리를 조이는 하의, 곱게 화장한 얼굴로 등장한다. 

노동의 현장에 있는 여성들에게도 여전히 노동과는 관계가 없는 꾸밈이 강요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걸 '꾸밈 노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을 깨달으며 나의 스타일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브라를 잘 안하기 시작한지는 2년, 힐도 특별하지 않으면 안 신고, 펜슬 스커트는 옷장에 고이 걸려있다.


근데 아주 솔직히 말하면, 가끔 재미 없을 때가 있다.

예전에 내 신발장에 10개의 선택지가 있었다면, 지금은 5개 정도만 남은거니까. 


아침에 눈을 떠 가만히 그날 입을 옷을 그려본다.

저 셔츠에 그 치마는 어떨까, 생각하다가 음 그럼 그 힐을 신어야 좋은데- 

운동화를 신는 걸 상상하다가 절래 절래.

그 블라우스에 그 바지는 어떨까, 하다가 브라를 안하면 너무 티날텐데. 그 정도는 괜찮을까? 아니면 브라를 할까? 불편한데... 하다가 절래 절래.


그러다 어떤 순간에는 '내가 힐 안 신는다고, 브라를 안 한다고 뭐가 달라져?' 하는 순간까지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그럼 다르지. 내 몸이 편한데. 얼마나 편한데.'

하며 슬깃 웃음이 난다. 


이건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거창한 운동도 아니고, 꼭 거창한 의미가 있지도 않고- 그냥 내가 편해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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