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선 민달팽이 이야기
"난 여과장이랑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다들 얼른 들어가 봐!"
옆 부서 남팀장이다. 외부 업체와의 계약 관리를 전담하는 조직이라 다른 사람들이 퇴근하면 별로 할 일도 없을 텐데 여과장 입사 이후로 야근이 잦다. 여과장, 정확하게 여대리는 남팀장이 강력하게 주장해서 채용된 사람이다.
공기업 특성 상 경력직 채용이 흔치는 않지만 남팀장은 로펌 변호사, 민간 대기업 법무팀 출신으로 계약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간 계약 검토가 필요한 상황이면 감사팀에서 취합해서 로펌에 위탁했었는데, 우리도 드디어 내부 전문가가 생겨서 일처리가 훨씬 수월해지겠다고 모두들 큰 기대를 하곤 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입사하자마자 본인 혼자 힘으로는 할 수가 없다고 서포트 해줄 인력이 필요하다며 추가 채용을 건의했다.
다른 부서에서 요청했다면 절대 받아들여질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계약 전담 조직이 생긴 건 처음이고 팀원들은 모두 순환보직 때문에 배치됐을 뿐, 관련 경험이 전혀 없다보니 인사팀에서 울며겨자먹기로 채용을 해줬다고 한다.
다만 이대리는 객관적으로 여대리가 왜 뽑힌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평가 시스템 개선 TF 당시, 인사 데이터를 우연히 봤는데 여대리는 법학 관련 전공자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이한 점은 로펌에서 비서 업무를 몇 년 했다는 것. 인사팀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블라인드 채용이 실현되었다", "능력자가 채용되었다"며 자축하기 바빴다. 오죽하면 다른 공기업 인사담당자들과 술자리에서 자랑처럼 떠들고 다닌다는 소문도 있다.
그렇게 큰 기대를 받았던 여대리는 입사 첫날 과장이 되었다. 남팀장이 팀원들을 불러 모아놓고 여대리의 실제 직급은 '대리' 지만 '과장'으로 부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너네들은 로펌에서 근무한 경력이 없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회사에 계약 전문가가 없으니 내가 직접 해야겠다며 여과장의 사무용품, 실내화 등도 챙겨주고 옆자리로 불러서 업무를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착한 직원들은 '새 직원을 잘 챙겨주네' 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오늘은 이대리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미안한데 성과평가 여과장한테 좀 몰아주자. 진짜 과장되야 할거 아냐?! 나랑 맨날 야근하면서 고생하는 거 다 알잖아~"
안 그래도 자취방 하수구 역류 때문에 사는 게 피곤하건만...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이대리는 머리가 띵해졌다. 성과평가 TO가 팀 위에 본부 단위로 배정된 상황에서, 남팀장은 여대리를 승진시키겠다고 같은 본부 소속 팀원들한테 물밑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팀원들은 다들 자발적으로 최저등급 받겠다고 동의했어. 이대리도 부탁좀 하자!"
자발적이라니? 계약 부서에 알아보니 너네들은 아는게 없으니 최하등급인줄 알라고 통보 당했다더라. 그리고, 이대리 외에 다른 부서의 팀원들도 일부가 이런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순간 이대리는 비품실에서 남팀장과 여과장을 마주쳤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자취방에 쓸 케이블 타이를 몇 개 슬쩍하려고 비품실을 뒤적거리다가, 상기된 얼굴의 두 사람을 화들짝 놀라며 마주쳤다. 이대리도 도둑질하다가 들킨 셈이니, 깜짝 놀라서 케이블 타이는 집어 던지고 급히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남팀장이 몇 번 그 날을 언급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급히 자리를 피하기 바빴다. 그때만 해도 경황이 없어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오늘에서야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남팀장은 애도 있는 사람인데 이건 100% 불륜이다, 그게 아니면 이 모든 일들이 설명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