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의 인생 설계를 위한 준비에서 저는 빼주세요

1호선 민달팽이 이야

"이대리 진짜 미안한데 부탁 좀 하자~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그래"

"저 본부장님 생선 당번도 하는데 코칭 당번이라니 이건 또 뭐에요..."

"실습시간을 얼마인가 채워야 한대나봐, 내일모레 나갈 사람이니까 마지막으로 부탁 좀 하자 응?"

공인중개사 시험에 좌절한 이본부장이 뜬금없이 코치 자격증에 꽂혔다. 대기업에서 임원으로 퇴직한 학교 선배가 기업 교육 강사로 잘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코치 자격증이라는걸 따려면 본인이 얼마나 좋은 질문을 하고 가이드의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실습을 했는지 증빙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부장은 사원대리급 직원들과 사이가 좋은 김팀장에게 '나한테 커리어 코칭을 받고싶은 직원들을 섭외해오라'는 미션을 내렸다. 김팀장도 분명 알고 있다. 본부장과 점심 식사도 불편해 죽겠는데 1:1로 코칭을 받고 싶어하는 직원이 있을 리가. 그래서 고민 끝에 순번제로 대리급 직원들에게 돌아가면서 1시간씩 본부장과의 코칭 시간을 반강제로 할당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대리 눈에 본부장은 '종이 호랑이' 같은 사람이었다. 임원으로서 호랑이처럼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팔랑거리는 얇은 종이에 그려진 호랑이 그림같은 존재. 늦은 나이에 사회 생활을 시작해서 지금 자리에 올라가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으리라. 혹시나 나이 때문에 책잡힐까봐 목소리도 못내고 전전긍긍하며 그저 시키는대로 일만 해왔던 세월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뒤늦게 선배를 잘 만나 임원이 되었지만 자기 주관도 없이 실무자들을 죄다 모아놓고 우리가 하는 일이 '거슬리지 않을지' 자꾸 묻고 다그치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머지않아 회사를 떠나게 될 텐데 자식들은 아빠 속도 모르고 차 사달라, 해외여행 보내달라, 용돈 올려달라, 명품 사달라, 어학연수 보내달라 땡깡만 부리고 있으니...

그래서 이대리는 절반은 안쓰러움, 절반은 응원하는 마음으로 코칭 당번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이건 코칭이 아니다.

"흠 그래, 자네는 앞으로 2~3년 내에 어떤 커리어를 꿈꾸고 있나?"

"잠시 고민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그 나이 때에는 회사에서 시키는 걸 다 하겠다, 뭐든 하겠다는 게 꿈이었어. 그래서 내가 그때 한게 뭐냐면~!#$$^"

...

"자, 그래서, 응?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그럼 다음 질문, 자네는 2~3년 내에 커리어를 변화하기 위해 지금 무슨 노력을 하고 있나?'

"저는..."

"지금은 뭐든지 다 배워두고 시키는 걸 잘 할 수 있어야 역량이 개발되는거야. 나때는 ~!#$%"

코칭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좋은 질문을 통해 도와주는 과정으로 알고 있었는데... 라떼 만드는 소리만 들은 지 한시간 째, 이대리가 정작 대답한 건 '고민해보겠습니다', '네', '저는' 밖에 없었다. 본부장의 이야기는 30대 후반을 지나 40대를 향해가는 여정에 이르렀다. 이대리는 오랜 시간 비슷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머리가 어지럽고,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도 말을 끊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1시간이 지나자 구세주처럼 김팀장님이 나타나 시간이 다 되었다고 알려주고 서야 본부장실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런 말도안되는 실습이 2-3번 반복되면서 이대리는 본부장과의 코칭 전에는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는 기술을 터득했다. 예를 들자면 얼마전에 다이소에서 산 초파리 트랩의 원리가 무엇인지? 원룸 외벽 두께가 얼마 이상이 되면 집이 따뜻할지 수학적으로 산출이 가능할까? 등등이다. 코칭 후기를 묻는 김팀장의 질문에 이대리는 "코치는 질문하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본부장님은 본인이 질문하고 대답도 다 하셔서 제가 할 말이 없다. 코치보다는 그냥 본인 자서전을 쓰시는게 나을것 같다"라고 대답했고, 김팀장도 웃으며 동의했다.

...

예상대로 본부장은 그 해에 퇴직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다행스럽게 코치 자격증도 취득했다.

회사를 떠나는 날, 본인이 실습했던 대리급 직원들을 불러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 원한다면 코칭해줄 수 있다, 대신에 이제 외부에 있으니 돈을 내고 받으라고 말했다. 모두 어이없었지만 그냥 안녕히 가시라 인사하고 뒤에서 욕했다.

얼마 후, 본부장은 제2의 인생 실현을 위해 이대리에게 코치 자격증을 어필하며 다른 기관에 소개좀 해달라고 전화가 왔다. 이대리는 알아보겠다 대답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핸드폰 번호를 차단했다. 퉤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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