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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단 May 08. 2024

아팠던 날도 지나고 나면 한 폭의 그림

제목은 김두엽 할머니 책의 한 구절입니다



일터에서 만나는 분들의 '오늘'이 나의 '내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성심껏 일을 해요. 노후는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니까요. 간혹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는 분을 만나도 '내일의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 상황이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노인분들을 돌봐드리는 일을 십여 년 하는 동안 내 나이도 앞자리가 바뀌었어요. 내 나이 앞자리가 바뀌고 나서부터는 '내일의 나'라는 생각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제가 일하는 곳에는요, '나도 저렇게 나이 들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멋진 분이 있는가 하면, '와 정말 내 노후가 저런 모습은 아니어야 해'라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분까지 정말 다양한 분들이 사셔요. 이렇게 매일 새로운 공부거리를 던져주시는 분들 덕분에 나는 매일 성장하고 있어요. 이런 곳에서 일을 하는 것이 너무 감사하죠, 배움도 주고 돈도 주니까요. 하하하.


이곳 주민들 연세는 육십 대부터 구십 대까지 다양하고요, 올해 백세살이 되신 왕언니도 계신답니다. "Amy, 백네살 생일을 축하해"라고 했다가 에이미 할머니한테 혼났어요. 한 살을 더 올려 말했다면서 '백세살!!' 이렇게 느낌표 어투로 강조하시더라고요. 하하하.

백세살의 에이미는 심지어 인디펜던트 빌딩에 사시기 때문에 care aide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으셔요. 완전 나의 롤모델이시죠. 나의 노후가 에이미 같으면 좋겠어요. 백세살까지 살고 싶다는 것이 아니고요, 에이미처럼 마지막까지 누군가의 도움 필요 없이 독립적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왕언니들과 왕오빠들을 돌봐드리는 일을 하다 보니 내 나이에 비해 좀 일찍 노후를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몸이 불편한 분들을 매일 보니까 건강에 대해 관심이 저절로 가요. 마치 건강염려증에 걸린 것처럼 건강에 관한 온갖 정보들을 찾아 읽게 돼요. 직업병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뉴스피드에 치매, 당뇨, 뇌경색 등등의 단어들이 보이면 무조건 클릭하게 되니까요. 이렇게 해서 모은 건강에 관련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써야 할 것 같고요, 오늘은 건강 다음으로 나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 중 한 가지를 쓰려고 해요. 이제야 본론이 시작된다는 뜻이죠. 하, 서론 길다... 하하하.



우리 노인 아파트 주민들은 부자예요. 시. 간. 부. 자.

꼭 지켜야 하는 아침, 점심, 저녁 세끼 식사 시간과 중간에 있는 액티비티 활동시간을 제외하면 나머지 시간은 정말 프리해요. 물론 식사도 "나 먹고 싶은 날에만 식당에 오겠소!" 해도 아무도 잔소리하지 않아요. 액티비티 활동도 강제는 아니니까요 사실 모든 게 자유예요.


자 그럼 긴 하루를 매일매일 우리의 왕언니 오빠님들은 어떻게 보내실까요?

아파트 복도에서 걷기 운동을 하시는 분은 매우 부지런하신 거고요.(하루 10분 정도?)

아파트 안에 있는 예배당에서 미사를 보시는 분은 신심이 매우 깊으신 거고요.(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정도)

Tea room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시는 분들은 소셜라이징을 좋아하시는 분이고요.(아주 가끔)

어쩌다 찾아오는 가족과 나들이를 다녀오시는 분은 가족의 보살핌이 있는 분이세요.(1년 내내 찾아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주민들도 많음)

그리고 대부분은 각자의 아파트에서 낮잠을 주무신다거나 TV 시청을 하시지요.(거의 하루 종일)


그러니까 제 관점으로는 우리 왕언니와 왕오빠들, 아. 무. 것. 도. 안. 하. 세. 요. 하. 루. 종. 일.



나는 노후에 이분들처럼 시간부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늘 다짐만 해오다가 내 나이 앞자리가 바뀌고 나서야 구체적으로 노후 공부를 시작했어요.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생활을 위해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재무, 건강, 관계(특히 가족, 친구), 그리고 권태에 대한 대비라고 해요.


오늘은 왕언니 오빠들처럼 남아도는 시간 속에서 점점 게을러지고, 매일 같은 날을 살아가는 게 싫증 날 수 있는, 내 노후의 권태를 대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취미생활 한 가지에 대해 쓰려고 해요.

노래, 악기, 운동, 그림, 뜨개질 등 뭐 하나 할 줄 아는 게 없는 똥손 똥몸인 저는 그래도 의욕만큼은 넘쳐서 모두 다 배우고 싶었어요. (왕언니 오빠들처럼 노후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바람이 저의 에너지를 샘솟게 해 주네요)


그러던 중에 <그림 그리는 할머니 김두엽입니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어요. 이 책은 저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답니다. 그림 그리기를 배운 적도 없는 할머니가 여든세 살에 그림을 시작하셨다니! 할머니의 그림들은 동심이 가득했고 밝고 화려했어요. 순수한 할머니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이었어요.


할머니의 그림은 오래전에 봤던 영화 속 실제 인물을 떠올리게 했어요. 캐나다의 생활화가 Maud Lewis의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영화였는데 내가 평소 좋아하던 배우 Sally hawkins가 주인공이라서 영화에 대한 정보도 없이 보기 시작했었어요. 영화가 끝난 후에는 샐리 호킨스가 연기한 모두 루이스에 폭 빠지게 되었지요.

영화 속 실제 인물인 모드 루이스도 김두엽 할머니처럼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분인데요, 김두엽 할머니의 그림을 보면서 모드 루이스의 그림이 떠오르더라고요. 저는 두 분의 그림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김두엽 할머니의 책을 읽으면서 '아 나도 모드 루이스나 김두엽 할머니처럼 생활 그림을 그리고 싶다'라는 꿈이 생긴 거죠. 넵, 꿈이에요. 하하하.



Maud Lewis stands in front of her home in Marshalltown, outside Digby, N.S. / 샐리 호킨스가 모두 루이스 역을 한 영화


2022년 가을에 드디어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칠십 대 팔십 대에도 바쁘게 살아야 하거든요. 권태로운 노후 생활 탈출 작전 1호입니다.

나도 김두엽 할머니 나이즈음에 독학으로 예쁜 그림을 그리는 꿈을 꿔 보지만, 네네네, 타고난 똥손인 저에게 그건 정말 꿈이죠. 그래서 조금 일찍 기초라도 배워두면 '모두 루이스와 김두엽 할머니의 뒤를 잇는 생활화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꿈을 꾸며 그림 수업을 받기 시작했답니다. '꿈은 원대하게!!'라고들 하잖아요. 하하하.




일주일에 한 번, 1시간 30분 수업인데요, 줄 긋기부터 시작해서 구를 그리고 정육면체를 그리기까지 4개월이 걸렸어요. 구를 완성하고 나서 보니 툭 튀어나오기도 했고 찌그러지기도 했더라고요. 완벽한 동그라미로 다시 그리고 싶었지만, 세상에나 두 달을 또 구만 그린다고? 미련을 버리고 정육면체를 시작했지요. 오오오, 그리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어요. 하지만 이것도 살짝 비뚤어진 모서리로 마무리가 되어 아쉬웠어요. 하지만 나는 그릴 수 있는 내가 너무 대견했어요. 이런 그림들을 내가 그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신나게 꿈을 꿨어요. 김두엽 할머니처럼 갤러리도 만들고 전시회도 하고. 하하하.




딸이 유기묘 집사예요. 뉴욕에서 혼자 지내면서 직장생활을 할 때 퇴근 후에 집에 들어오면 허전하고 외로웠대요. 그래서 보호소에서 데리고 온 아이인데 지금도 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잘 지내고 있어요. 저는 고양이에 관심이 없던 사람인데 딸 덕에 고양이의 매력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색연필로 그리는 첫 그림으로 고양이를 골랐답니다. 물론 딸의 고양이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요. 그저 같은 과를 그렸다는 거지요. 하하하.


그리고 김두엽 할머니가 해바라기를 많이 그리신다고 했는데 저도 해바라기를 좋아해요. 그래서 두 번째로 고른 그림이 해바라기랍니다. 두 달 만에 완성하면서 제 이름을 적을 때 너무 기뻤어요. 두 달 만에 드디어 해바라기 끝!




해바라기 다음에 고른 그림은 컵 안에 있는 강아지예요. 아마도 저는 귀여운 그림을 좋아하나 봐요, 그리고 싶은 것들을 고르는 동안 제 눈이 머무는 건 거의 다 이런 종류더라고요. 사람마다 끌리는 그림이 다르다고 하던데 저는 귀요미 종류였어요. 이런 거만 그리면 나중에 김두엽 할머니처럼 밝고 맑은 동심이 피어오르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하하하.


마음은 정말 때마다 달라져요. 색연필로 세 개의 그림을 완성하고 나니까 다시 연필로 세밀하게 그리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그래서 고른 게 또 고양이 그림이네요. 그런데 이 고양이는 딸이 키우는 그 녀석과 아주 비슷하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까지 내가 그린 그림 중에 이것이 가장 맘에 들어요. 왠지 모르지만 이 그림을 보면 심장 속에 뽀로롱 비눗방울이 터지는 느낌이 들어요. 기분이 묘하게 좋아진다는 얘기예요. 하하하.





이 세 개의 그림은 인터넷에서 귀여운 그림을 찾아서 나 혼자 쓱쓱 따라 그리고 색칠해 본 거예요. 역시 나는 귀여운 그림을 좋아하나 봐요. 이 그림들을 그리는 동안 제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더라고요.


미술 선생님이 지난달에 여행을 떠나셨어요. 사 개월 후에 돌아오신다고 하니 돌아오실 때까지 만다라 색칠놀이를 다시 해야겠어요. 그림을 배우기 전에는 만다라 그림에 색칠을 하면서 하루를 마감하곤 했거든요. 마음이 차분해져서 좋았어요. 오늘 하루 복잡했던 머리와 심란했던 마음을 잠시 쉬게 하고 싶으신 분들께 만다라 색칠하기를 추천합니다.




오늘은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를 위해 내가 준비하고 있는 것 중에서 그림 배우기에 대해서 써 봤어요. 김두엽 할머니 책에 '아팠던 날도 지나고 나면 한 폭의 그림'이라는 구절이 있어요. 저도 글쓰기가 힘들어지는 날이 오면 그때는 스케치북 안에 한 폭의 그림으로 나의 이야기를 담고 싶어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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