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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 Sep 18. 2023

MBTI(성격유형검사)는 과학이다

엄마는 ESTJ(외향적이며 엄격한 관리자 유형)


삼 주만에 준비한 여행이라 어디서든 사고가 생기겠지 예상했지만, 출발도 하기 전 인천공항에서 삐끗할 줄은 몰랐다.


나는 PP카드가 있어서 비행기 시간이 되기 전까지 라운지에서 쉬면 되는데, 아이들이 문제였다. 마침 여행 출발 전 아이들이 만든 카드로 공짜 커피와 100원으로 식사가 가능해서 그걸 쓰라고 했다. 여름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면세점 구경한 뒤 카페 가서 샌드위치를 먹겠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아이의 눈빛이 따뜻하지는 않았음은 물론이다.


아이들과 헤어져 혼자 라운지에 가서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음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샐러드와 과일 몇 조각에 커피만 가져다 놓고 앉아서 앱으로 라디오를 들었다. 음악을 들으니 마음이 조금 진정돼서 채팅창에 글을 썼더니, 디제이가 사연을 읽어 주며  언젠가는 아이들이 엄마 마음 알아줄 거라 다독여 주었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고 열두 시간 비행 끝에 빈 공항에 내리자 또 일이 생겼다. 출발 전날은 짐을 싸느라, 비행기에서는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 때문에 잠을 거의 못 자서 너무 피곤했다.(그들은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내리기 직전까지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내내 수다를 떨었다. 아마 패키지여행에 나선 친구 사이인 것 같았는데(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지 수면제를 먹고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낀 내 귀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소리가 다 들렸다.)


나는 어서 빨리 숙소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입국심사 줄이 줄어들 생각을 안 했다.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채워 온 국적기에서 내린 사람들은 짧은 줄이 어디인지 매의 눈으로 살피며 이리저리 줄을 옮기고 있었다. 오른쪽 줄이 빨리 줄어드는 것 같아서 우리도 그리로 가자고 했더니 봄과 여름 둘 다 질색을 했다. 기왕 선 줄, 그대로 있자면서. 결국 줄 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여권에 도장을 받고(그것도 공항 직원이 내가 옮기자고 했던 바로 그 오른쪽으로 가라고 해서!) 오스트리아에 입국했다.


숙소로 가는 ÖBB(외베베-오스트리아 국영 철도) 기차마저 제 시간보다 늦게 왔다. 기차를 기다리던 승강장에서 아이들과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소리가 높아졌다(입국장에서부터 그곳까지 동선이 비슷했던 어느 가족이 우리 눈치를 보았고, 엄마에게 칭얼대던 그집 아기는 울음을 뚝 그쳤다).


가방은 무겁고, 몸은 피곤하고, 아이들이 엄마를 민망해하는 듯한 모습에 속이 상해서 나는 살짝 눈물마저 났다. 엄마의 눈물에 당황한 여름은 얼른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게 진짜 사과는 아니라는 걸 아이도 알고 나도 알았다.


어찌어찌 기차를 탔고, 역 바로 옆에 있는 숙소를 단번에 찾았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가니 긴장이 풀렸다. 예상보다 좋은 숙소에서, 오는 길에 장본 것들로 휘리릭 밥까지 해서 먹고 나니 본격적으로 아이들과 싸울 힘이 생겼다.


내가 샌드위치 먹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엄마는 자꾸 100원 식사에 꽂혀서 마음에도 안 드는 아침 먹으라고 강요했잖아요...


그건 그렇네...
그래도 아니, 이 먼 빈까지 국적기 직항으로 태워서 이렇게 좋은 호텔에 데려왔는데, 엄마를 존경하지는 못할 망정, 엄마가 부끄러워? 그게 딸이 엄마에게 가져야 할 태도야? 응?


엄마랑 우리는 성격이 다르잖아요......
엄마가 아니라 그런 상황이 부끄럽단 말이에요.
우리는 둘 다 I(내향형)인데, 엄마는 E(외향형)예요.


그렇게 시작된 싸움은 MBTI(엠비티아이-성격유형검사) 분석으로 이어졌다. 어떻게 사람 성격을 알파벳 글자 여덟 개로 분석하냐고, 말도 안 된다고 했다가 성격의 특징을 설명하는 아이들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혈액형 네 개로 나누는 것보다 낫긴 하구나.


엄마는 검사를 해보나 마나 ESTJ(이에스티제이)란다.

엄격한 관리자, ESTJ!  


나는 아이들을 내 기준으로 통제하고 내가 말한 대로 행동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구나. 그날 이후 우리는 여행 내내 내가 무슨 행동을 할 때마다, “역시 ESTJ!” 이러면서 웃었다.


그러므로 이 여행은 자기가 ISTJ(아이에스티제이-내성적이며 청렴결백한 논리주의자)로 살아야 하는 줄 알고 본성을 억눌렀던 엄마가 ESTJ의 실체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사진-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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