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기부기 Jul 31. 2024

저녁 먹고 갈래요?

이 말 안 했으면 어쩔 뻔 했어?!

코로나가 기승이었던 2021년 2월, 마스크 착용이 의무이던 시절에 당시 집 근처(연남동) 카페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다.


먼저 도착한 카페에서 카톡으로 상대에게 "제가 자리 잡아놨어요~"라고 보낸 후, 함께 주문하고 계산하는 민망한 과정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카운터로 가 주문을 때렸다. 진동벨을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두둥.. 카페로 올라오는 계단에 한 남자가 등장했다.


나는 단번에 소개팅 상대를 알아보았다. 마스크를 썼지만 까맣고 조그만 눈이 굉장히 선해보였고, 눈빛에 호기심이 어려있기도, 순수함이 비치기도 했다. 부드러우면서 겸손하지만 구김살 없이 당당한 느낌, 내가 추구하던 외모는 이니었지만 다듬어주고 싶은 원석 같은 느낌이 남편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그도 나를 알아보았는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로 함께 이동했다.



첫 만남 당시를 남편은 나에게서 후광이 비쳤다고 회상한다. 나는 얼굴에서 포인트라 생각하는 부위가 눈이라, 마스크 착용이 엄청난 메리트였다. 메이크업도 다른 덴 거의 안하지만 눈에는 힘을 주기 때문에, 눈만 보고 인식된 나의 첫 인상은 꽤나 강렬했을 것 같다. 그렇게 나에게 반했던(?) 남편은 본인의 필승 스킬을 발휘하며 거부할 수 없이 빠져드는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스킬이 뭐였냐면, '리스닝'과 '리액션'이었다. 리액션이야 누구나 얼마든지 할 수는 있지만, 남편의 그것은 조금 특별한 능력이었다. 나의 경우 말 하기를 좋아하고 말주변도 있는 편이라, 내가 말을 더 하기 위한 '스피커'로서의 리액션을 한다. 그런데 당시 남편은 내 말을 차분히 들어주면서, 나로 하여금 더 많은 이야기를 끄집어내게 하는 '리스너'로서의 리액션을 해 주었다. 나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할 말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나의 깊은 이야기를, 길고도 자세하게 들려 주었다.



알고 보니 남편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나에게 그것은 특별한 선물과도 같은 성격이었다. 나는 말을 해야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말을 잘하는 사람과도 곧 잘 케미가 맞는다. 그러나.. 누구든 자기 말을 하고 싶지 않은가. 그 누가 내 얘기를 본인의 얘기를 넣어두고 세상 가장 흥미롭게 들어주겠는가.. 그런데 남편은 나에게 최초의 경험을 시켜주고 있었다. 언변이 꽤나 훌륭한 사람과 대화할 때도 느껴지지 않았던 경외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이 사람 뭐지? 여기서 대화가 끝나면 안 될 것 같은데?' 싶었다.


1차로 만난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며 보낸 시간만 서너 시간이었다. 자리를 마무리하고 일어나는데, 남편을 그냥 보내기가 너무 아쉬웠다. 아니, 헤어지면 거기서 끝나버릴 것 같았다. 나에게는 그가 특별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에겐 내가 특별하지까진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저녁시간도 다가오겠다, 나는 용기를 내어 "저녁 약속 있어요?" 라고 물었다. 동그란 눈으로 없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대뜸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고, 남편은 당연히 좋다고 했다.



2차로 간 레스토랑은 프랑스식 요리를 와인과 페어링하기 좋은 곳이었다. 내가 평소 즐겨 가던 곳이었는데 남자와 단 둘이 가기는 처음이었다. 분위기는 극적으로 로맨틱했고, 음식은 알던대로 훌륭했다. 향긋한 와인까지 한 잔 더해지니 엷게나마 남아있던 긴장마저 풀어지며, 애인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편안해졌다. 우리는 각자의 여행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좋아하는 것들에 대하여 공유하고, 서로의 매력적인 면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알아갔다. 내 앞에 있는 남편의 모습이 더 없이 섹시해서, 거기서도 그냥 집에 보낼 수 없었다.


3차로 들어간 중국집에서는, 둘 다 좋아한다는 꿔바로우를 시켜놓고 칭따오 맥주를 열심히 마시며 흥이 더 오른 채 이야기를 이어 갔다. 대화 코드도 잘 맞았지만, 무엇보다 꾸밈 없이 나를 바라보던 남편의 눈빛이 너무 좋았다. 막차까지 마무리 후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 준 남편과의 첫 키스는 우리가 처음 만난 지 약 여덟 시간 만이었다.


많은 것이 닮았고, 더욱 닮아가는 우리


원래도 나는 운명을 믿었지만, 남편과의 첫 만남을 생각하면 그것이 나에게도 실현되었다고 믿을 수 밖에 없다. 살아 본 결과, 결단이 필요한 이슈에 있어 남편은 뜸을 들여가며 여유롭게 가는 편이고, 나는 바로 결정을 내리거나 최단경로로 가는 걸 선호한다. 만약 내가 그 날 남편에게 저녁을 먹자고 제안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서로 맘에 들었더라도 남편과 나의 속도가 맞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남편에게 나와의 애프터 의사가 있는지 바로 확인하기 위해 식사 제안을 했고, 그의 대답으로 나의 노선을 정할 요랑이었다. 혹여라도 남편이 그 날의 선약이 있었다면 그는 처음 만난 나에게 둘러댈 사람이 아니었고, 거기서 나는 단념했을 것이다. 우리를 이어주려고 모든 타이밍을 우주 만물이 합심해서 만들어 준 것이다.


내 말을 듣는 게 좋다는 남편은, 살면서 나를 위해 본인 얘기를 꺼내려다 만 적도 많을 것이다. 또한 과거엔 좋았던 나의 얘기가 이제는 잔소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도 남편에게 '지금 이 말을 해도 될까?' 눈치보는 일이 생겨났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한다. 처음 만난 그 날처럼 내가 제안하고, 남편이 받아주는 우리의 케미는 분명 멋진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이유 모를 확신이 있어서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