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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옥 Oct 21. 2019

너는 왜 쓰레기를 안고 살아?

어릴 때 엄마는 종종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겼다. 물론 그때는 ‘감정 쓰레기통’이란 말도 없었고, 그게 뭔지도 몰랐다. 이제야 생각하니 ‘그랬었구나, 내가 쓰레기통이었구나.’ 란 생각이 든다. 엄마는 마음속에 화가 생기면 그 화를 들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화가 생기는 족족 가까이에 있고 제일 만만한 나에게 그대로 던져버렸다.


“엄마는 이렇게 힘들어 죽겠는데, 너는 도대체 하는 게 뭐야? 어?”

“남의 집 자식들은 다 알아서 척척 잘도 도와준다는데 이건 뭐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으이구.”

“뭐 잘한다고 할까 봐 나서 나서길. 하여간.”

“저거 봐라 저거 봐. 잘~한다.”        

“저걸 어따 써 그래.”


엄마가 던진 쓰레기는 어린 나의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점점 버거워져 갔지만 나 또한 어떻게 처리해야 할 줄을 몰랐다. 엄마처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줄도 버릴 줄도 몰랐다. 그저 주는 대로 받아두었다.

쌓인 쓰레기는 점점 썩어갔고 나를 공격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온몸으로 공격을 받아내는 수밖에.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가슴이 답답했고, 우울했다. 때로는 이대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마흔을 넘겼다. 이제야 가끔 엄마에게 예전의 일을 물어본다.

“엄마가 그때 나한테 그랬잖아. 근데 왜 그런 거야?”

엄마는 전혀 모르는 얘기인 냥 “엄마가?”라고 오히려 묻는다. 당황스럽기도 하도 화도 살짝 난다. “어. 그랬잖아. 생각 안 나?”라고 다시 묻는다. 엄마는 다시 대답한다.


“몰라 나는 기억도 안나. 어제 일도 생각 안 나는데 그게 도대체 언제 적 얘기야.”


어이가 없다. 억울하기 짝이 없다. 기억이 안 난다고? 나는 30년 넘게 안고 있었는데?

엄마는 40년 전에 시부모님이 했던 말, 아빠가 무심코 던진 말, 명절 때 형님, 동서들이 했던 말까지 다 기억한다. 그때 어떤 상황이었고, 그 사람 표정이 어땠는지까지도.

엄마는 시시때때로 옛날 생각이 날 때마다 "내가 그때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라며 몇십 년 전 얘기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해내고 얘기한다. 그럴 때마다 곤란해지는 건 아빠다. 엄마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얘기는 시댁 얘기이기 때문이다. 아빠는 늘 멋쩍게 "별걸 다 기억하네. 나는 기억도 안 나는구만."이라고 한다. 엄마는 또 이 말에 왜 기억이 안 나냐며 발끈한다.    

 

이런 엄마가 왜 엄마가 한 말은 기억이 안 난다는 걸까. 이렇게 기억력이 좋은 엄마가.

이럴 때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기억이 정말 안 나는 걸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까? 기억은 나지만 모른 척을 하는 걸까?


오랜 생각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은 이렇다.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이유는 어떤 생각이나 의도를 갖고 던진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몇십 년 전에 길 가다 던진 쓰레기를 기억하는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쓰레기를 던졌다는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도 그런 게 아닐까 한다. 어떤 생각을 갖고 했던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냥 뱉어버린 말들이다. 당연히 기억할 수 없다. 기억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어쩌면 기억하는 게 더 섭섭하고 무서운 일일 수도 있다. 어떤 의도를 갖고 던졌다는 뜻일 테니까.


나는 엄마가 생각 없이 던진 쓰레기를 무슨 의미 있는 선물이라도 되는 냥 버리지도 못하고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그리고는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았다. ‘왜 나한테 이걸 줬을까?’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나.


받은 쓰레기는 즉시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든가 아니면 쓰레기통을 찾아 버리면 그만이다.(이때 귀찮다고 가까이의 다른 누군가에게 던져버리면 안 된다. 예전에 엄마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는 “이상한 사람이야.” 혹은 “오늘 재수가 없네.”하고 넘기면 될 일이다. 그러면 하루 이틀만 지나도 쓰레기를 받은 일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이 간단할 걸 나는 여태 몰랐다. 물론 엄마가 던진 게 쓰레기였다는 것도 몰랐지만.

그동안 안고 사느라 고생 많았다. 이젠 전부 버리자. 미련 없이 버리자. 하나도 남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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