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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척이라도 해야 하나요?

by 김자옥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우발적으로 총을 쏜다. 하지만 재판에서 사람들은 사건의 동기보다 그의 태도에 주목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픔을 보이지 않았고, 시신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밀크커피를 마셨다는 점이 문제 삼아진다. 그는 사회가 기대하는 감정적 반응을 따르지 않으며, 자신의 행동을 굳이 해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그를 냉혹한 인간으로 단정 짓고, 살인과 별개로 그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


나라에 큰 사고가 발생했을 때,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되면 각종 행사와 오락 프로그램이 줄줄이 취소된다. SNS에서도 즐겁고 가벼운 글은 자제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애도는 반드시 조용하고 엄숙해야만 할까? 누군가는 노래나 춤으로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눈물 나게 웃긴 얘기를 하면서 마음을 추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마저도 허용하지 않는다. 웃긴 영상이나 가벼운 글이라도 올라오면 ‘이 시기에 굳이’라며 눈치를 챙기라는 비난의 글이 쏟아진다. ‘슬픈 척’이라도 하라는 글을 봤을 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사람의 감정을 어찌 알고. 게다가 슬프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감정엔 정답이 없는데. 왜 감정까지 정해주려 할까.

어디 나라만 그럴까. 전에 회사의 한 동료가 아이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동료는 출근했고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했다. 그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수군댔다. “애를 먼저 보냈는데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그는 점점 무감각하고 매정하기까지 한 사람이 되었다. 마치 뫼르소처럼.

반대의 경우도 있다. 종종 누구누구의 ‘태도 논란’이란 제목의 연예 기사를 본다. 어느 무대에서 무표정한 모습을 보였다거나, 축하 자리에서 기뻐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논란은 생각보다 커지고 결국 해당 연예인은 해명을 내놓는다. 순간의 표정이든 자기감정이든 이를 해명해야 할까 싶지만 사람들은 해명을 원하고 당사자는 “절대 그렇지 않다” 같은 코미디 같은 해명을 내놓는다.

실제로 한 연예인은 데뷔 초 잘 웃지 않는다는 이유로 태도 논란에 휘말렸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 그녀는 아버지의 병세가 심각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갓 데뷔한 여자 연예인에게 사람들이 기대하는 표정이 있었을 것이다. 대중이 원하는 모습과 자신의 감정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대중을 위해 활짝 웃어야 했을까? 그게 프로인 건가.


이처럼 남의 감정도 판단하는 시대라 그럴까. SNS에서는 “이거 나만 이상해?” “이 상황이 불편한 건 내가 이상한 건가?” 하며 조심스럽게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글이 자주 보인다. 누군가 동의하고, 동조하는 사람이 많으면 작성자는 그때서야 안도감을 느끼며 자유롭게 자기감정을 드러낸다. 반대로 “별게 다”란 반응이 대세면 작성자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어쩌면 우린 감정까지 남의 판단을 받으며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다.


상식이 꼭 옳음일까. 다수의 생각이 정답일까. 사정에 따라선 어머니의 죽음이 슬프지 않을 수도, 동료의 수상이 마냥 기쁘지 않을 수도, 남들은 아무렇지 않아도 나는 불편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가끔 회사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으면 지나가던 상사는 말했다. “좀 웃어. 뭐가 그렇게 심각해.” 그는 ‘즐겁게 일하는 직원들’이란 이상적인 바람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카뮈는 ‘사회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틀이 있다. 그 틀을 벗어나면 틀 안으로 들어가라는 무언의 압박을 하거나 혹은 아예 이방인 취급을 한다.

감정과 표현 방식 거기에 기간까지 정해주는 사회에서 우리는 참 모순적인 존재다. 자신의 감정은 그대로 인정받고 싶으면서 타인의 감정은 쉽게 판단하고, 솔직한 심정을 담은 글을 올리면서도 돌아올 반응을 걱정한다. 공감은 안 되지만 분위기상 따르는 척이라도 한다. 이 모든 순간에 나는 뫼르소이고 싶으면서도, 뫼르소가 아니길 바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감정의 ‘정답’이 아니라, 개개인의 감정과 표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나다움과 너다움을 함께 지키는 기초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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