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무기 삼는 사람들

by 김자옥

다정하고 상처가 많아 보였던 P


처음 P는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어느 날 P는 어려웠던 가정환경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는 일찍 집을 생사를 알 수 없고, 엄마 혼자 아이 셋을 키웠는데 유독 딸인 자신에게 엄마는 감정을 다 풀며 차별대우를 했다고 했다. 어려운 살림에도 남자 형제들에게는 온갖 지원을 다 해주면서 자기에겐 학교 준비물조차 사주지 않았다며. 그러면서 P는 말했다.

“난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안 좋아.”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은 ‘힘들었겠다’였다. P도 엄마도. 다음은 ‘나도 차별받고 컸는데’였다. 부모님은 인정하지 않지만 우리 집도 아들과 차별이 분명히 있었고, 난 때때로 속상하고, 슬프고, 서럽고, 화도 났다. 게다가 엄마는 어린 내 앞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고, 아빠나 주변 친척들의 험담도 쏟아내며 괜한 내게 화풀이할 때도 있었다. 난 P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P가 가깝게 여겨졌다. 그다음은 안타까움이었다. ‘그래도 계속 과거에 매여있으면 본인만 힘든데. 게다가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여기면 괴로움이 끝이 없을 텐데.’ P를 괴로움에서 꺼내주고 싶었다.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나는 P와 금방 가까워졌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


나르시시스트는 사람을 빨리 자기편으로 만드는 기술이 있다. 보통, 과한 칭찬이나 친절, 만난 기간에 비해 이른 애정 공세나 잦은 연락, “우린 천생연분이야”하는 식의 달콤한 말들과 선물 공세로 정신을 쏙 빼놓곤 관계를 빠르게 진전시킨다. 언뜻 보기엔 사랑과 관심이 넘치는 행동 같지만, 본질은 상대의 경계를 허물고 빠르게 관계를 장악하려는 전략이다. 이런 걸 일컬어 러브바밍(Love Bombing)이라고 한다.

러브바밍은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며 매력적인 것만 있지는 않다. 속 깊은 상처나 아픔 혹은 자신의 취약점을 고백하기도 한다. 상대방은 이를 두고 자신이 그만큼 신뢰가 가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며 동정과 연민을 갖는다. 동시에 빠르게 경계도 푼다.


지인 A도 전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이런 말을 했다.

“그때는... 그냥 이 사람이 너무 외로워 보여서 곁에 있고 싶었어.”

전남편은 가난한 집안 이야기, 버려졌던 경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과거를 담담히 말하며 자신은 누군가를 만날 자격이 없다고 했다. 마음이 여린 A는 “내가 곁에 있어 줄게”라며 관계를 받아들였고, 둘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하지만 진짜 모습은 결혼 후 드러났다.


동정과 연민을 유발하는 러브바밍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가 많이 하는 행동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팀에 신입이 들어왔을 때다. 행동이 빠릿빠릿하고 외국어 회화까지 능숙했던 그는 단번에 P의 눈에 들었다. 정확히는, 능력 있고 순응적인 태도가 눈에 띄었고, P는 그를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본 듯했다. P는 신입에게 시도 때도 없이 자잘한 선물을 주고, 듣기에 민망할 만큼 과한 칭찬을 쏟아냈다. 신입이 말하는 건 뭐든 공감했고, 마치 같은 관심사와 감정을 가진 것처럼 행동했다.

당연히 신입은 자신이 특별한 신임을 얻었다고 여겼고, P가 주는 일이라면 뭐든 기쁜 마음으로 처리했다. 심지어 마땅히 경력자인 P가 해야 할 일까지 떠안았다. 신입은 자신의 능력과 성과가 진심으로 인정받은 거라 믿었겠지만, 그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를 붕붕 띄우며 황홀하게 만들든, 끝없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든, 피해자는 나르시시스트에게 정신없이 끌린다.


카멜레온 같은 사람들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수줍음도 있어 보이던 P는 의외로 새로운 사람들과 꽤 빨리 친해졌다. 다들 아직 서먹하고 아는 것도 별로 없을 때도 P는 가장 먼저 그에 관한 정보를 알았고 어느새 가까운 사이까지 되었다. 늘 이게 궁금증으로 남았는데 어느 날 P가 말했다.

“같은 걸 좋아하면 빨리 친해지지.”

그러고 보니 P는 새로운 사람이 올 때면 특히 그가 마음에 들 때면, 그와 스타일을 같게 하거나 좋아한다는 브랜드를 따라 좋아하고, 때론 말투까지 비슷해졌다. 그러곤 어느새 단짝처럼 굴었다.


상대방의 언어, 행동, 표정 등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하는 것을 심리학 용어로는 미러링(Mirroring)이라고 한다. 미러링은 상대방과 친밀감을 높이고 신뢰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상대방을 자신에게 끌어들이고 심리적으로 조작할 때 주로 이용한다. 상대방이 표현하는 감정에 과하게 공감하는 척하고, 상대방이 좋아하는 취미나 관심사에 과도하게 관심을 보이고, 말투나 제스처를 따라 한다. 이는 무의식적보다는 의도적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동질감을 느끼며 경계를 쉽게 허문다. 이 점을 노리는 것이다.


처음 P를 봤을 때 나와 비슷한 면이 많다고 느꼈다. 자란 환경뿐만 아니라 어딘가 감정 포인트가 닮은 듯했고 내 이야기에 누구보다 공감을 많이 했다. 일하는 방식도 생각도 비슷한 면이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P는 나와만 닮은 게 아니었다. 때론 신입과, 또 때론 우상처럼 따르던 상사와도 너무 닮아 있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나와 신입 그리고 상사는 전혀 닮은 데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르시시스트는 이처럼 정체성이 모호하다. 실제로 나르시시스트는 ‘자기’가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남의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남에게 보이는 이미지와 남이 하는 평판만 좇는 사람들이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언제든 변할 수 있다.


언제나 피해자


P는 자주 회사에서의 억울한 일을 내게 털어놓았다. 신입 시절 선배들 일을 다 떠맡았다는 이야기, 진급에서 여러 번 밀렸다는 불만, 상사가 다른 팀의 일까지 받아와 자기에게 떠넘긴다는 하소연. 항상 P는 희생자였다. 말은 많았지만, 정작 상황을 바꾸려 나서진 않았다. 대신, 나는 P를 대신해 불합리한 말에 반박하고, 그의 편을 들어주곤 했다. 그럴수록 나는 지쳤지만, 그는 늘 조용히 물러서 있었다.


지인 A의 전남편도 그랬다. 그는 가족 사이에서도 회사에서도 언제나 참고 이해하는 착한 사람이었다.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종종 주변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는다며 힘들어하기도 했다. 그는 늘 피해자였다. 그럴 때마다 A는 연민에 휩싸였고, 더 잘해줘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그가 상식 밖의 행동을 해도, ‘자라온 환경 때문’이라며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남편의 끝없는 하소연에, 결국 A도 무너져 갔다.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겉으로는 조용하고 다정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들은 연약한 척, 상처 많은 척, 피해자인 척하며 상대의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의도된 전략일 수 있다. 특히, 공감력이 뛰어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들에게. 이들은 타인의 감정에 너무 잘 반응하는 대신, 자신을 지키는 데 서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에게 가장 ‘쉬운 타깃’이 된다.


P와의 관계는 결국 서서히 틀어졌다. 처음엔 동질감과 공감대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점점 이상하다 싶은 점들이 생겼다. 어느 땐 넘치게 공감을 하는 것 같더니 어느 땐 어딘가 묘하게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겉으로는 생각이 맞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때 P에게는 신입이라는 새로운 타깃이 나타났고 P의 태도는 완전히 변했다.


나르시시스트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내가 잘못인 건 아니다


나르시시스트에게 빠져들었다고, 내가 어리석었던 건 아니다. 그들이 사람의 심리를 파고드는 방식은 매우 교묘하고, 다분히 의도적이고 계획적이다. 누구든 당할 수 있고, 누구든 흔들릴 수 있다. 중요한 건, 이제는 알게 됐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과하게 다가오는 사람, 지나치게 공감하는 사람, 너무 빠르게 경계를 허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타났을 땐, 마음의 속도를 잠시 늦춰야 한다. 관계는 천천히 쌓여야 단단하다. 다정함과 상처를 무기처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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