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가 일상이 된 삶 속에서
아들이 어느 날 말했다. “나 정도면 금수저 같아.”
진짜 금수저가 뭔지 모르는구나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아들이 답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주변에 워낙 어나더 레벨인 애들이 많아서 우리 집이 그냥 그런 줄 알았는데 대학 와서 보니까 힘든 친구들도 많더라고.”
고등학교 친구들 얘기는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다. 누구는 할아버지가 어느 은행 회장이라고 했고, 누구는 아버지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의 대표라고 했고, 또 누구는 부모님이 꽤 유명한 연예인이라고도 했다. 난 “그래?”하며 놀라긴 했어도 잊고 있었는데 아이는 같이 학교 생활을 했으니 영향이 없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난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비교가 많이 됐어?”
아이는 답했다.
“어느 정도여야 비교도 하는데. 이건 뭐, 아예 다른 세상이니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고등학교 때는 다 같은 동네이니 동네 얘기는 특별히 없었는데 대학에선 각지에서 친구들이 오니 동네 얘기를 많이 하나 보다. 그러면서 사는 동네로 자기들끼리 잘 사네, 못 사네를 논하는 것 같다. 일단 서울이라고 하면 잘사는 거다. 아들이 난 경기도라며 뒤로 물러서자 경기도 어디냐고 묻고 분당이라고 하자 누군가는 “분당이 서울 아냐?”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분당이면 서울보다 낫지 않냐?”라고 해서 얼결에 금수저가 됐나 보다.
고만고만한 친구들끼리 이런 얘기로 시시덕거렸을 모습을 상상하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하지만 마냥 유쾌하진 않았다. 왜들 그리 비교하고 구분을 지으려 할까 싶어서다. 물로 구분을 짓는다고 진짜로 서로 경계를 세우고 멀리하는 건 아니겠지만 나눈다는 것 자체가 좀 쓸쓸한 일 아닌가.
우린 때때로 비교를 통해 내 위치를 판단한다. 그리고 그게 행복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한 지인은 위험한 투자를 했다가 큰 빚을 졌다는 친구 얘기를 전했다. 그는 걱정이라는 듯 수선을 떨며 말했지만 내용 없이 표정만 보면 신나서 얘기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난 그에게서 이런 말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린 거기에 비하면 진짜 행복한 거다.’
이런 비교는 단지 학교나 동네 혹은 가까운 친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는 SNS라는 창을 통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의 비교까지 이어진다. 아이디만 눈에 익을 뿐 만난 적도 없고 앞으로도 크게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의 일상을 보게 됐다. 그만큼 비교도 쉬워졌고, 비교 대상도 많아졌다.
그 덕에, 멀쩡히 잘살다가도 남의 여행 사진에 난 왜 이렇게 일에 허덕이며 사나 싶다. 여기저기서 열심히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 난 너무 느슨하게 사는 것 같고, 취미 생활을 즐기는 걸 보면 내 인생이 지루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알아서일까. 가끔은 보여주기식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어느 해외 인스타그래머는 여러 나라에 여행을 다니는 것처럼 사진을 올렸지만 합성임이 드러났다. 어느 지인 말에 의하면 요즘은 골프장에서 사진 찍느라 진행이 안 되는 일이 종종 있다고 했다. 심지어는 인스타용 사진만 찍는 사람도 있다고. 난 아직 이것까진 믿지 못하겠다.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인식하는 순간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다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사람들이 볼 나를 신경 쓰다 보니 이런 일까지 생기는 게 아닌가 싶다. ‘진짜 나’보다 ‘연출된 나’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까지 온 게 아닌지.
우린 대충 짐작한다. 깔끔한 집안 사진을 올릴 땐 주변 지저분한 것들은 치운다는 걸. 잘 차려입었을 때 사진을 찍어 올리고, 즐겁고 행복한 순간만 보여준다는 걸. 이성이 감정을 이기지 못하듯, 그래도 우린 그런 사진을 보며 부러워하고 때론 질투도 느낀다.
만약 사진 속 주인공이 일론머스크나 미스터비스트라면? 그때도 내 삶과 비교하며 질투를 느낄까. 그렇진 않다. 아예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만다. 하지만 나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인스타에서 다른 모습을 보이면 비교가 시작된다.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만큼은 살고 싶다.
반백년 가까이 산 나도 이러는데 아이에게 “비교하지 마라. 보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물질이 다가 아니다”하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미 세상은 비교할 수밖에 없는 판에서 굴러가고, 보이는 게 중요해진 시대가 되었는데.
어릴 적 아이는 “엄마는 나를 왜 낳았어?”라는 질문을 했다. 답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 아이뿐만 아니라 요즘 아이들이 이 같은 의문을 많이 갖는 듯하다. 왜 낳아서 안 해도 될 고생을 하게 했냐는 거다. 그럴듯한 답 아니 변명을 찾고 싶었다. “내가 낳은 거 아니고 네가 삶을 선택한 거야” 하는 사뭇 철학자 같은 말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듣는 아이에겐 공허함만 남길뿐이다.
얼마 전에 우연히 깨달았다. 여기엔 답을 할 수가 없다는 걸. 답 대신 아이에게 힘든 세상을 물려준 것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한다는 걸. ‘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살아보니 행복하네’가 아니라 매 순간 남들과 비교하며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사는 게 고통이라고 느끼게 한 것에 대한 반성. 그에 대한 책임으로 그나마 덜 흔들리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며 살아갈 수 있도록은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경쟁에서 이기라는 대신.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이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흉내 내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정확히 그렇지 않나 싶다. 아이 세대엔 더 심해지겠지. 다른 건 몰라도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다.
네가 욕망하는 게 정말 너의 욕망인지 남의 욕망인지 되돌아보라고. 그것만 알아도 보이는 것 많은 세상에서 중심 잡기가 훨씬 수월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