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얼굴, 은밀한 공격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의 수동 공격

by 김자옥

A의 전남편은 집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출장이 잡혔다. 처음엔 "당연히 같이 가야지"라고 하지만 막판에 가면 꼭 '갑자기' 출장이나 급한 회의가 잡혔다며 함께하지 않았다. 혹은 함께했다가도 핸드폰만 계속 만지작거리다가 마치 급한 연락이라도 온 것처럼 “어쩌지? 나 지금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라며 A와 아이를 두고 먼저 자리를 떴다.

이사를 앞두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A는 남편이 회사에 연차를 미리 신청했는지 여러 번 확인했다. 그는 “당연하지”라며 이사 날이니 급해도 부르지 말라는 당부까지 해뒀다고 했다. 하지만 전날 그는 태연하게 “회사에 나가봐야 할 것 같아”라고 했다. 결국 이사는 A 혼자 했다. 이런 일로 둘은 자주 다툼이 있었다. A가 하기 싫으면 처음부터 싫다고 하면 될 걸 왜 겉으로는 좋은 척, 협조할 것처럼 하곤 매번 빠져나가냐고 추궁하자 전남편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일부러 그랬어? 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

‘일부러’라는 말이 A는 크게 다가왔다. 그와 살면서 “일부러 이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뭔가를 부탁하면 해줄 것처럼 하곤 결국엔 잊었다고 하고, A가 급한 상황이 되어 도움을 청하면 한가롭게 있으면서도 자기도 지금 중요한 일이 있다며 외면했다. 이럴 때마다 일부러 자기를 골탕 먹이려고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행동 패턴은 단순한 무책임을 넘어서는 심리적 특성이 드러난다. 이것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적인 수동공격적 행동 패턴이다.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겉으로는 순응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은 외현적 나르시시스트만큼 자기중심적이다. 강한 통제 욕구가 있으며 누군가의 지시나 요구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자신은 지시를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특권의식 때문이다. 누군가의 지시나 요구에 응하면 자기 자신이 낮아지는 거라는 미성숙한 발상을 한다. 따라서 타인의 기대나 요구에 따라야 하는 상황은 때때로 분노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남들의 시선에 예민한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드러내고 거부 의사를 표현하지 못한다. 속마음은 어떻든 외부에는 ‘좋은 사람’이란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다. 따라서 간접적이고 수동적인 방법으로 불만이나 분노를 표현한다. 이런 걸 수동 공격이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행동이 수동 공격에 해당한다. 하겠다고 한 일을 미루거나 대충 처리한다. 말로는 동의하곤 협조하지 않는다. 부탁한 걸 종종 잊고 빠뜨린다. 부주의한 행동을 반복한다. 상대의 욕구나 어려움을 외면한다. 도와줄 것처럼 하곤 무관심하다.


전 회사의 P는 종종 공유해야 할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그러곤 나중에 태연한 얼굴로 “내가 그거 안 보내줬나?”라거나 “필요없을 거 같아서 안 보냈는데”라고 했다. 임원들이 함께 있는 회의 자리에서는 내 의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하곤 팀원들끼리만 있자 “안 그래도 바쁜데 일이 더 늘겠다”라며 나를 겨냥해 말했다.

한 상사는 종종 무리한 업무를 슬쩍 던져주곤 알아서 하라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불만을 표시하면 관련 없는 사항을 들먹이며 업무를 가중하고, 사소한 걸 트집 잡으며 크게 비난했다. 때론 일부러 결재를 늦춰 퇴근을 어렵게 하기도 했다.


나는 P와 상사를 겪으며 많이 혼란스러웠다. 우선 나 자신을 의심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무리한 걸 바라는 건가? 그러면서 상대를 이해해보려 했다. 설마 일부러 그랬겠어? 깜빡 했겠지. 상대방이 밉고 싫을 때마다 너그럽고 관대하지 못한 내 모습이 싫어지기도 했다.

A는 전남편이 하기로 한 일들을 안 하고 갑자기 일정을 트는 일이 늘면서 불안감과 긴장감이 높아졌다고 했다. 이번에도 그러는 거 아냐? 하며 가슴을 졸이는 일이 많았다. 그러면서 남편에 대한 불신도 쌓였다.

이 외에도 감정적 소진이 일어난다.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하고, 대비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된다. 더불어 이들은 타인 앞에서는 배려심 있고 관대한 사람처럼 행동해 당하는 사람만 답답한 경우가 많다. 어디에 호소해도 믿어주지 않는 일이 대부분이다. 이는 무력감을 안겨준다.

내현적 나르시시스트가 수동 공격을 하는 심리엔 두려움이 크게 차지한다. 이들은 진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취약한 면을 노출시키는 것으로 인식하고 위험한 일로 받아들인다. 취약해진다는 것은 상황의 통제력을 잃을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나르시시스트가 아주 싫어하는 상황이다. 어느 순간에도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있어야 안심이 된다.

이들은 또한 자신의 진짜 감정이나 욕구를 표현했을 때 돌아올 거부반응을 두려워한다.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대체로 내면화된 깊은 수치심이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드러냈을 때 비난이나 무시가 돌아온 경험들은 자기를 이상적인 모습으로 꾸미고, 부정적으로 비칠 수 있는 모습은 감추며 자기를 과도하게 방어하게 한다.

또 하나는 책임감을 피하려는 심리다. 이들은 남들을 통제하는 건 좋아하지만 그만큼 필요한 의무를 다하는 건 피하고 싶어 한다. 약삭빠르고 계산적으로 행동해서 해야 할 의무를 피했을 때 이들은 만족감을 얻는다. 남들이 자기 속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 이들은 행복하다.


수동 공격에 일일이 따지며 논쟁하거나 상대를 설득하려 애쓰는 건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특히 흥분해서 따질수록 이들은 통제력을 얻었다는 생각에 쾌감을 느낀다. 그만큼 자신의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는 이들의 행동을 더 강화할 뿐이다.

이들의 행동에 지나치게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 왜 그럴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원하는 게 뭘까 등에 몰두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이들은 자신의 통제욕과 불안을 감당하지 못해 그렇게 행동하는 것뿐이다. 이들 마음이 어떻든 나는 내가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이때 감정적인 태도는 피하는 게 좋다. 상대를 자극하는 건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 따른다.

수동 공격에 대처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철저히 대비하는 것이다. 이들이 바뀔 거라는 기대, 잘 얘기하면 말이 통할 거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상담치료 전문의 레스 카터는 이들이 감정이나 논쟁을 건전한 이성으로 다룰 거라는 기대를 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논리나 이치, 타당성을 따질수록 이들은 기분이 상해 어긋날 가능성이 크다.

나의 요구 사항과 경계를 명확히 하면서 동시에 언제든 대비를 해둬야 한다. 구체적 방법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1. 요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예: “자료를 내일 오전 10시까지 이메일로 보내주실 수 있나요?”

2. 모든 요청과 합의는 기록으로 남기기

이메일, 문자, 메신저 등을 활용해 흔적을 남긴다.

3. 플랜 B를 항상 준비해 두기

급한 상황에 대비해 다른 대안(도와줄 사람, 다른 방법)을 마련한다.

4. 애매한 답변은 명확히 확인받기

예: “그럼 이 일은 맡아주시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5. 시간과 조건에 경계 설정하기

예: “오늘 6시 이후에는 연락이 어렵습니다.” “자료가 불충분하면 업무 진행이 어렵습니다.”

6. 상대 감정에 집중하기보다 나의 필요에 초점 맞추기

예: 세 번째 얘기하는 건데, 상황이 바뀌면 미리 말씀해 주제요.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를 바꾸려 애쓰는 대신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상대의 행동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필요를 명확히 챙겨야 한다. 물리적 피해와 감정적 소모를 최소화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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