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초나라 장왕이 투월초의 난을 평정한 뒤 공을 세운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고, 총희(寵姬)로 하여금 옆에서 시중을 들도록 하였다. 밤이 되도록 주연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광풍이 불어 촛불이 모두 꺼져버렸다. 그리고는 어둠 속에서 불현듯 왕의 총희가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총희는 장왕에게 누군가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자가 있어 그자의 갓끈을 잡아 뜯었으니 불을 켜면 그자가 누군지 가려낼 수 있을 것이라고 고하였다. 그러나 장왕은 촛불을 켜지 못하도록 제지하고는 오히려 신하들에게 “오늘은 과인과 함께 마시는 날이니, 갓끈을 끊어버리지 않는 자는 이 자리를 즐기지 않는 것으로 알겠다(今日與寡人飮, 不絶冠纓者不歡)”라고 말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모두 갓끈을 끊어버리고 여흥을 다한 뒤 연회를 마쳤다.
3년 뒤, 초나라가 진(晉)나라와 전쟁을 하였는데, 한 장수가 선봉에 나서 죽기를 무릅쓰고 분투한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 장왕이 그 장수를 불러 특별히 잘 대우해준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그토록 목숨을 아끼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장수는 3년 전의 연회 때 술에 취하여 죽을죄를 지었으나 왕이 범인을 색출하지 않고 관대하게 용서해준 은혜를 갚은 것이라고 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에서 발췌한 글이다. 이 일화로 절영지연[絶纓之宴] 또는 절영지회(絶纓之會)란 말이 나왔다. ‘갓끈을 끊고 즐기는 연회’라는 말이지만 남에게 너그러운 덕(德)을 베풀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잘못을 너무 따져 묻지 말고 관용을 베풀라고 할 때 종종 이 일화를 예로 들곤 한다. 난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이게 관용인가? 이게 덕인가? 분명 희롱을 당한 건 장왕이 아니고 총희다. 근데 왜 장왕이 관용을 베풀까? 아무리 그 옛날에는 왕의 여자면 왕의 소유가 되는 것이라 이해를 해보려 하지만 이해가 쉽지 않다. 왕의 소유인 거지 왕이 곧 그녀, 그녀가 곧 왕일 리는 없을 텐데 말이다.
가끔은 더 큰 일을 위해 작은 실수 정도는 덮을 줄 알아야 한다며 이 일화를 들기도 한다. 총희에게도 이 일이 작은 일일지 궁금하다. 일화에 따라서는 ‘몸을 건드렸다’는 말 대신 더 적나라하게 표현되기도 했지만 어떤 일이 됐든 이 일은 왕이 당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왕이 멋대로 ‘작은 일’이라 생각하고 이 정도는 너그럽게 넘어가도 된다고 판단한 걸까. 총희의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이런 일은 주변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억울함이나 화를 입은 당사자에게 제삼자가 너그럽게 용서해주라고, 관용을 베풀라고, 마음을 크게 가지라고 한다. 때론 관용을 베풀지 않으면 냉정하다 혹은 인간미가 없다며 오히려 피해를 입은 사람을 비난하기도 한다. 심지어 ‘너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자’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과연 관용이나 덕이 누가 베풀라고 해서 베풀 수 있는 일인가? 용서를 누가 하란다고 해서 할 수 있냐는 말이다. 관용이든 덕이든 용서든 마음이 움직여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아직 억울함이 남아 있고 화가 풀리지 않은 사람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길 강요하는 건 전혀 너그럽지 못한 행동이다. 어쩌면 이건 또 다른 가해일 수도 있다.
관용은 본인이 당한 일에나 베푸는 것이다. 남이 당한 일에 관용을 베풀라 마라 하는 것은 오지랖이자 오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