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가는 길
마음이 향해 있는 곳, 친정에 간다. 바람은 긴 꼬리를 달고 내 얼굴에 찬 기운을 휘감았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딸의 손을 꽉 쥐고 젊음의 열기를 흡수했다. 말없이 퍼지는 침묵의 대화. 말이 없어도 편안한 관계가 얼마나 좋은지. 난 오랫동안 엄마와 그런 관계를 꿈꿨었다. 공기처럼 늘 내 옆에 머물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내가 힘들면 달려갈 곳, 나의 은신처, 엄마의 품. 엄마가 나의 방패가 돼주기를 철없던 나는 엄마를 참 많이도 그리워했다.
미움이 북받쳐 오르면서도 핏줄이 당기는 이유를 몰랐는데, 겉으로 드러난 미움의 바닥에는 사랑이 있었다는 걸 자식을 낳고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그런 사랑이 나에게도 있을까?
분명 미움이었고 미움인 줄 알고 살았는데 엄마의 사랑법은 그렇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왜 딱 부러지게 사랑으로 알게끔 표현하지 않았을까? 강하게 키우려고 그런 걸까? 그거였다면 엄마는 실패했다. 난 전혀 강하지 않다.
사랑한다는 문자에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답하지 않는 엄마. 당차게 살아간 엄마의 양육법에 사랑은 숨겨야 된다고, 드러내지 말아야 된다고 할머니께 배운 걸까? 사랑의 회초리를 심으면서 어린 딸이 그게 사랑인 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아깝다. 모르고 지나간 사랑의 시간이. 미움인 줄 알고 살아간 시간이 아깝다.
친정에 가면 현관 입구부터 코에 들이닥치는 친정 냄새. 엄마는 오래전부터 늙은이들 냄새난다고 장롱 여기저기, 이불 사이사이 비누를 박아놓으셨다. 비누냄새와 퀴퀴한 냄새의 조화. 내가 늘 맡고 있는 시아버님의 냄새와는 차원이 다르다.
30년 이상 살아 온 집은 손 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습기가 고여 내려앉은 천장, 오랜 시간만큼 수북하게 쌓인 먼지덩어리인지 장식품인지 알 수 없는 가짜꽃들의 빛깔, 하얗던 곰이 회색곰이 되는 동안, 곧았던 엄마의 허리가 휘었고 빽빽했던 아빠의 머리가 민둥산이 되었다.
미니 요양원처럼 바뀐 엄마 방은 훈기가 감돌았다. 엄마 방에도 어김없이 비누내음이 흐른다. 좁은 침대 위의 베개들과 이불들, 침대 머리에는 엄마가 손쉽게 잡을 수 있게 잡다한 것들이 가득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엄마는 이 방에서 딸자식 생각하며 눈물 지었을 것이다.
아버지 방은 아버지의 외모를 젊게 바꿔줄 가발 두 개가 햇빛을 받으며 나란히 펼쳐져 있다. 아버지의 시금털털한 냄새와 비누냄새가 방안에 퍼져있어 이 냄새가 언제부터 났던 냄새였나 생각해 보았다.
나의 후각은 비누 향이 섞인 요상한 냄새와 아버지의 퀴퀴한 냄새를 이미 알고 있다. 갑자기 생뚱맞게 생각난 까닭은 시아버지의 냄새와 비슷하지만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강도가 천지차이라는 것이다.
오래간만에 들른 친정의 냄새가 반가운 이유는 부모님과 살을 부대끼며 견뎌온 시간과 피붙이에 대한 사랑이 더해져 유일한 지문처럼 무의식 속에 자연스레 새겨져 몸과 감각이 기억하는 아련한 추억처럼 정겹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나라에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나의 부모, 내 동생, 그리고 나, 우리 네 식구는 참으로 각자도생의 피를 제대로 물려받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오랜 속담이 우리 집이야기인 듯 무정하게 연락 없이 잘도 지내왔다. 그 연락 없음의 어색함도 없이, 얼굴보니 그저 반갑기만 하다. 연로한 부모님을 살뜰히 챙기는 늙어가는 내 남동생은 꿋꿋하게 홀로 잘 살아가고 있고 아픔을 참으며 잘 견디는 엄마, 80이 넘은 나이에 일 다니시는 아빠, 그야말로 친정 식구들은 공동체이면서 혼자인 듯 살아가고 있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친정에 요즘은 아무 이유 없이 무작정 놀러 간다.
'엄마, 나 이혼하고 엄마랑 살면 안 돼?' '엄마, 나 여기 와서 살고 싶어.' 정말 이 말이 입에서 맴돌았던 시절이 있었다. 힘들 때마다 엄마에게 기대어 살고 싶었었다. 어느새 더는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그냥 살았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나를 죽이고 살았다. 그러길 잘했다. 지금 엄마의 초월한 모습을 보니 그러길 천 번 만 번 잘했다. 내가 제일 잘하는 '참는 것'이 이제야 효과를 본 셈이다.
뼈밖에 없는 엄마를 내 품에 꽉 차도록 안았다. 엄마가 용돈 하라며 십만 원을 손에 쥐어준다. 아마 내가 온다고 연락받은 순간부터 준비하셨을 것이다. 와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사랑을 표현하는 울 엄마.
아버지의 피땀으로 벌어다 준 돈을 난 가방 깊숙이 넣고 친정집을 나섰다. 내가 숱하게 걸었던 친정 근처의 길을 딸의 손을 잡고 걸으니 왠지 친구와 걷는 기분이다. 예전과 완전히 달라진 그 길들이 새롭게 내 마음에 저장되었다. 내가 딸 나이에 걸었던 그 친숙한 거리의 공기가 아직도 예전 그대로인 것처럼 '반가워, 오랜만이야' 인사하는 것 같았다. 언제고 아무 때나 오면 반겨주는 그 낯익은 동네의 공기와 바람. 고개 들어 파란 하늘과 구름을 보았다. 언제 올지 모를 이곳의 냄새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내가 갈 곳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아파트 4층 난간에서 울 아빠는 딸과 손녀의 꽁무니가 안 보일 때까지 쳐다보고 계실 것이다.
내 집으로 가는 내내 친정 냄새가 코에서 맴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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