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을 읽는 이유
나의 독서 취향은 단연 소설이다. 학창 시절, 한참 공부해야 할 시기에 소설이나 읽고 있는 내가 한심할 때가 많았다. 나는 소설을 왜 그토록 읽어댔을까? 소설을 읽다 보면 내가 하고자 하는 길이 불쑥 나오기를 기대했을까? 아니면 방황하는 척, 뭐라도 붙들고 있어야 그나마 시간을 허비했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였을까?
1980년대에는 책을 빌리면 도서대출증에 도장을 찍어줬었다. 요즘의 여권만 한 크기의 도서대출증이 하나둘씩 늘어날 때마다 내가 나름 책을 많이 읽었다는 느낌보다 도서대출증이 늘어났던 것에 더 뿌듯함을 느끼던 철없는 시절이었다. 공부할 시기에 전공서적보다 소설을 더 열심히 읽은 탓에 아까운 등록금만 날린 셈이다. 차라리 자기 개발서를 읽었더라면 지금 좀 나아졌을까?
소설을 왜 읽는지는 한참 나이 들어서도 잘 몰랐는데 요즘 단편을 읽기 시작한 후부터 그 이유를 조금씩 인식하게 되었다. 마치 살면서 느끼는 고통의 진액만 쭈욱 뽑아놓은 것 같은 단편소설의 카타르시스가 활자 중독에 가까울 만큼 빠져들게 했고 고차원적인 감정의 세계로 나를 안내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양한 감정의 서사는 내면을 깊게 두드려 가슴을 시리게 했고 심연에 깔린 고통과 슬픔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섬세한 표현에는 눈물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의 꿈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불을 지피는 글력(文章力)이 부러워지기까지 했다.
소설 속 인물들의 감정은 그들만의 것이 아닌 나도 느끼는 감정이니 혼자 끙끙대며 애쓰지 말 것, 고통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말 못 하는 아이가 울음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내 감정이 어떤 건지 도대체 나조차 모를 때 소설이 알아채는 느낌이랄까? 나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쓰다듬어주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 심란한 소설을 읽다 보면 후회스러울 때도 있지만 은근 중독성이 있다 보니 옆으로 밀어놓았다가도 슬그머니 가져와 이리저리 굴려본다. 또 아픔이 올 걸 알면서도 아픔을 극대화시키려는 것은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아픔, 위로, 또 아픔 뒤에 남는 공허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예전에는 내용의 흐름을 주로 즐겼다면 지금은 글의 문장을 이해하려고 집중한다. 그만큼 읽는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단편을 읽으면서 느낀 건 주제의 자유로움과 열린 결말이다. 화자의 이름을 굳이 정하지 않아도 되고 꼭 주인공이 사람일 필요도 없다. 독자를 이해시키려고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아도 되고 작가의 생각을 선명하고 깊게 또는 헷갈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아갔다. 간혹 괜찮은 문장임은 확실한데 도통 무슨 내용인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내 맘대로 해석하며 읽어나갈 수도 있다. 읽는 동안 마음이 아프면 아픈 데로 재밌으면 재밌는 데로 짧은 시간, 긴 여운에 집중하면서 읽다 보면 어느새 책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과 같이 고민하기도 하고 내가 위로받기도 한다. 가끔 마지막에 남긴 문장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하루 종일 애가 탈 때도 있다. 그럴 때 하루 종일 그 뜻을 알고 싶어서 집착의 하루가 시작된다. 그 집착이 하루를 망치기도 한다. 하얀 여백이 싫어서, 마지막이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면서, 깊이, 더 깊이 빠지고 싶은 관성을 느낀다.
나의 청춘을 책임졌던 수많은 소설 중에 처음 읽은 소설 '제인 에어'가 기억난다. 손바닥보다 조금 컸던 책의 겉표지에 앞치마를 하고 고개 숙인 제인 에어의 옆모습이 내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어떤 문장도 대사도 기억나지 않지만 어린 소녀의 마음을 아련하게 물들였던 그 감성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흔적으로 깊게 남아있다.
{김애란 님 '비행운'단편집 / '서른' 내용 발췌}
(p.293~294)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 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
세상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소식을 전하면서도 한편으론 언니가 이런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봤다고 할까 봐 겁이 나요.
(p.316~317)
지금 선 자리가 위태롭고 아찔해도, 징검다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어도, 한 발 한 발 제가 발 디딜 자리가 미사일처럼 커다랗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이 시절을 바르게 건너간 뒤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 좀 늦었어도 잘했지. 사실 나는 이걸 잘한다니까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당장 제 앞을 가르는 물의 세기는 가파르고, 돌다리 사이의 간격은 너무 멀어 눈에 보이지조차 않네요. 그래서 이렇게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오래된 물음표 하나만 응시하고 있어요. 정말 중요한 '돈'과 역시 '시간'을 헤아리며, 초조해질 때마다, 한 손으로 짚어왔고, 지금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것.
'어찌해야 하나.'
그러면 저항하듯 제 속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요.
'내가, 무얼, 더.'
언니,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될까요. 마흔의, 환갑의 나는 어떤 얼굴로 살아가게 될지, 어떤 말을 붙잡고 어떤 믿음을 감당하며 살지 모르겠어요. 바뀌는 건 상황이 아니라 사람일까요.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바꿀 수 없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요. 언니는 엽서 끝자락에 그렇게 적었죠?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거 같다고. 조만간 다시 옛날이 될 오늘이, 이렇게 지금 제 앞에 우두커니 있네요.
김애란 님의 단편집은 아픔 있는 사람들만 모아놨다. 인물 간의 갈등뿐 아니라 배경도 고통스럽다. 등장인물의 슬픔이 나에게로 전염된다. 주인공이 왠지 나 같아서 심란해진다. 단편은 확실한 결말이 없다. 극적인 반전도 없이 현실의 비참함이 그대로 남겨진 채 그 이후의 삶은 없다. 그래서 더 가슴 아프다.
그래서 나는 슬픔에 빠져있다. 책을 읽는 이유가 독서의 즐거움이 아니라 슬픔을 즐기기 위한 것처럼 말이다. 나의 우울모드가 발동이 걸려 계속 우울모드를 유지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은 마치 그걸 알기라도 하듯 행간에 슬픔의 여운을 가득 남겨놓았다. 마음껏 슬픔을 즐기라는 듯이.
슬픔이 내 몸에 넘치고 넘쳐 눈물이 우르르 쏟아지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때도 있다. 책 속의 주인공이 나에게 들어와 나를 통해 위로를 받고 쓸쓸히 퇴장하는 기분이다.
그래서 다 읽고 나면 슬픔의 여운만 있는 게 아니라 허무함도 남는다. 주인공을 이제 보내줘야 하는 허무함, 그 쓸쓸함을 이제 나 혼자 짊어져야 하니 또 다른 책을 집어 슬픔의 허기를 채운다. 책 속으로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면 그것도 병이 될까? 그 허기를 달랠 길 없어 다 읽은 책을 건드려보고 책의 겉표지를 한없이 들여다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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