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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 모든 것이 새롭도다

by 달자

태양빛의 잔상이 여기저기 반짝이는 오전이다. 가늘게 무늬를 이룬 구름띠를 보며 진하게 커피를 탔다. 카페인을 몸에 넣어줘야 하루를 또렷하게 잘 지탱할 수 있다.




나의 첫 번째 일과는 제일 쉬우면서 가장 어려운 일, 삼시세끼 밥 짓는 일이다. 아침은 우럭매운탕을 준비했다. 중간크기의 우럭 두 마리를 어젯밤에 손질해 놓았었다. 무를 넣고 고추장 풀어서 끓이다 보면 육수가 걸쭉하게 배어 나온다. 중간에 간을 보고 제일 맛있는 맛이 느껴졌을 때 '더 맛있어져라' 주문을 건 다음 불을 끄고 잠시 뜸을 들인다. 식탁에 반찬 몇 가지를 놓고 우리 식구가 더 건강해지기를 바라며 매운탕을 올려놓았다.


난 아버님을 모시고부터 식사 준비를 행사 치르듯 긴장하면서 준비한다. 입맛이 까다로워지는 노년기의 식성을 맞추다 보니 나까지 예민해졌다. 손맛에 정성이면 다 된 거라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생각했던 맛이 느껴져야 비로소 안심이 된다. 그렇게 아침 행사가 잘 치러져야 점심에도 잘할 수 있겠다는 의지가 용솟음친다. 용솟음이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나에겐 식사준비가 큰 일이다.

"그냥 편한 마음으로 차려드리면 되지, 그게 어려워?"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어려운 건 어려운 거다. 노인공경이라는 부담감도 있지만 마음 한쪽에는 내 자존심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제는 잘하는 게 없어." 라는 소리가 싫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손이 느려터진 나의 알량한 자존심이 더 잘하라고 다그친다. 그게 뭐라고. 하여간 그렇다.




나의 두 번째 일은 고요한 오전을 잘 보내는 것이다. 뭘 읽어도 잘 읽어낼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한 금쪽같은 시간, 집중력이 흐릿할 때는 잡념에 빠져들어 나를 또 못살게 굴기도 한다.

무거운 머릿속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 음악을 듣기도 하고 집중력을 쏟아 소설을 한 글자씩 곱씹으며 읽어보기도 한다. 글을 읽다가 뭔가 글감이 떠오를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면 급하게 노트북을 켜고 키보드를 두들긴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 시원하게 써지지는 않는다. 글 속의 어떤 문장이 글을 쓰고 싶게 했는지 머릿속을 들어다 보며 그 무언가를 잡기 위해 애를 쓴다.


머릿속에서 "도대체 뭘 찾아?" 물어본다. 여러 가지 단어들이 뒤죽박죽 뒤엉켜 있어서 머리 밖으로 시원하게 끄집어내고 싶은데 잘 안 된다. 도대체 무슨 생각들이 쌓여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나의 세 번째 일과는 산책이다. 겨울로 접어든 쓸쓸한 길을 걷다 보면 외롭다는 느낌이 먼저 들지만 하늘과 대지가 만들어낸 생명들과 나란히 걷다 보면 어느새 신선한 에너지가 몸속에 흐른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순간 뭔가 희망이 부풀어 오르면서 다 잘될 것 같다는 생각과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교차한다.


숲의 바싹 마른 가지들과 열매들을 보고 호수 위에서 잔물결을 일으키는 오리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겨울을 나는 자연의 섭리를 느낀다. 그러다 나도 그 속으로 들어가 어느새 자연과 하나가 된다.


부끄러움도 잊고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색깔도, 모양도 제각각이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색채가 멀리서 보면 한 가지인데 가까이서 보면 하나같이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상처 난 듯 지저분해 보이는 것들도 카메라의 멋진 피사체로 둔갑한다.


NAUD5362.JPEG ©Dalja




후~~ 깊은 날숨에 근심 걱정을 실어 공기 중에 후욱 날려 보냈다. 가슴이 탁 트인다. 산책의 맛이다.



IMG_E6194.JPG ©Dalja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잘 견뎌내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못난 탓일까? 욕심이 많은 탓일까? 그냥 나 자체로도 얼마든지 괜찮다고 위로해 주고 싶은데 자꾸 마음이 속으로, 속으로만 기어들어간다.

날 내세우고 싶은 욕심, 인정받고 싶은 욕심, 내가 더 갖고 싶은 욕심, 자유를 찾아 훨훨 날아가고 싶은 욕심.... 자꾸 욕심이 많아진다. 상대방의 말에 정확하게 뭐가 맞고 틀린 지 구구절절 말하고 싶은데 말이 안 나온다. 머릿속이 하는 말과 마음에서 하는 말이 서로 잘났다고 싸우고 있다. 그 사이에서 내 육신은 어느 편으로 가야 할지 길을 잃었다. 잔뜩 우거진 갈대숲의 푹신한 땅에 내 몸을 구겨 넣고 위로받고 싶다.


내 속도 모르는 남들의 말은 무시하기로 하자. 그들은 나를 잘 모르면서 합리화하고 그럴 거라 짐작한 말들이니까. 남들이 들이대는 잣대가 나의 자존감을 무너뜨려도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을 거다.




차가운 벤치에 한 쌍이 어깨동무를 하고 다정히 앉아있다. 난 언제 두 몸이 한 몸처럼 다정한 적이 있었던가? 까마득하다. 마음에서 용기가 안 난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보려 하지 않고 멀리서 찾으려고 하니 고독하다. 바보같이.


나이 든 부부의 모습은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각자의 길을 간다. 젊었을 때는 뜻이 안 맞아 싸우고 내 것을 먼저 내세웠지만 나이 들면서 그런 모습은 점차 사라진다. 이제 서로의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볼 뿐 강요하지 않는다. 주름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서로 할퀴고 영원히 미워할 것 같았던 마음은 조금씩 과거로 사라지게 된다. 추억으로 쌓이는 대신 외로움이 찾아온다.


미운 사람이 자꾸 생각나면 얼른 나를 본다. 나는 어떤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무심코 뱉은 말에 상처받은 사람이 어딘가에 한 명은 있을 것이다.




산책길에 봤던 생명들, 바람의 냄새와 촉감, 걸으며 생각했던 것들을 글로 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내 속에 있는 생각들을 시원하게 모두 말하지는 못했지만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뱉어내니 후련하다. 글을 써보자고 시작한 시간은 환했는데 벌써 깜깜해졌다. 후다닥 근사하게 쓸 날이 언제 올까..




그래.. 외로움이 친구가 되었다면 잘 늙어가고 있는 중일 거야. 그리고 자연이라는 친구가 항상 옆에 있잖아. 아무 때나 가도 늘 새로운 에너지를 넘치게 안겨주는.


내일은 새로운 태양이 뜰 것이니 모든 것이 새롭도다 :)


IMG_E6198.JPG ©Dal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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