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리를 건너다
나는 모임이 끝난 후 집에 돌아와 그 모임에서 오갔던 여러 가지 말과 행동을 되짚어보는 습관이 있다. 내가 어떤 말을 들었고 나는 어떤 말을 했을까!
그 수선스럽고 윙윙거리는 것들은 내 머릿속에 소리로 남아 어떤 소리는 만족감으로 어떤 소리는 수치심으로 남는다.
이미 과거로 지나간 그 소리에 나 자신을 가두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있다.
요즘 읽기를 마친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다리를 건너다』에서도 나와 같이 어떤 말과 행동을 마음에 담아두고 속앓이를 하는 아쓰코라는 여자가 있다.
아쓰코의 남편은 여성 도의원에게 성희롱 발언을 했고, 동료로부터 부정적인 돈을 받았다. 아쓰코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속이는 게 싫었고 들킬까 봐 조바심친다. 하지만 남편은 며칠 지나면 모두 괜찮아질 거라 장담한다. 그 말도 맞다. 현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하지만 아쓰코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한다. 그렇다고 정의의 불꽃이 타올라 행동으로 나서는 성격은 아니어서 어쩌지 못해 갈팡질팡한다.
아쓰코는 불안한 나머지 주간지에 전화를 걸어 자극적인 뉴스를 실어달라 요구한다. 남편의 비리가 세간의 입에 오르내릴까 하는 두려움에 더 자극적인 뉴스로 덮어버리고 싶어 한다. 견디다 못한 아쓰코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남편의 가벼움에 누열(陋劣)함을 느껴 자살까지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은 평범하고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면서 버티고 이겨내고 때론 절망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이 그 많은 일들을 겪으며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나 자신의 양심에 달렸다. 양심대로 사느냐 마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도 결정된다.
그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작가는 훌쩍 70년 후의 이야기를 그려놓았다. 미래는 고도의 기술력으로 일상 속에서 로봇과 대화하며 생활하고 인간의 혈액세포에서 추출한 새로운 인류 '사인'이 등장한다. 인간은 여전히 고등동물이고 '사인'은 인간의 부속품으로 살아간다.
인간의 학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사인' 중의 한 명인 린은 도망을 선택하고 과거로 돌아간다. 하지만 과거에는 존재할 수 없는 '사인'.
세상의 부조리에 힘든 나머지 자살을 결심한 아쓰코는 이상한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그 소리는 며칠 전 선택하지 않은 물건이 자신의 바구니에 놓여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느낀 아쓰코가 세상의 눈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망상을 하게 만든 백도 통조림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다. 그 백도 통조림에 사인 중의 한 명인 '린'의 모습이 투영된다. '린'은 자신의 작은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한 명의 아이, 한 명의 선생님, 한 권의 책, 그리고 한 자루의 펜으로도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을 읊조린다. 그 말을 듣고 아쓰코는 정신을 차린다. 통조림을 맛있게 먹은 후 주간지에 남편의 비리를 제보한다. 차츰 아쓰코는 안정을 찾는다. 글 말미에는 '버려버리려 했던 자기의 양심을 이 통조림이 구해준 거라고, 쓰여있다.
그러면 아쓰코가 자살한 후의 미래는 어떠했을까? 70년 후, 아쓰코의 아들이 낳은 군푸는 가난했고 '사인' 중의 한 명인 '린'은 군푸의 아내로 살아가며 정신적인 학대를 당한다. 군푸는 자신만 남기고 가족들은 모두 떠났다는 것에 괴로움을 느끼며 살고 있었고 군푸의 아내로 살아가던 '린'마저 군푸의 곁에서 도망친다. 인간의 학대가 싫어서 도망친 곳은 '사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였고 하필 군푸의 할머니 아쓰코가 자살하려는 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린은 '사인'이라는 단어에서 말해주듯 자신이 아닌 다른 몸짓과 신호로 인간을 구원한다. 남편의 비리를 폭로한 아쓰코의 미래와 더 먼 미래에서 태어난 '린'은 다시 새로운 세상을 만났을까? 그것도 궁금하다.
다른 에피소드도 아쓰코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양심, 정의, 가치관에 대한 철학적인 내용이 담겨있다. 작가는 미래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불감(不感)의 시대이니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말고 양심대로 살 것, 도의에 어긋난 짓은 결국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등장인물들을 통해 말하고 있다.
내용 중에 복선으로 깔리는 쌀, 술, 그리고 백도 통조림, 이야기 곳곳에 의미심장하게 담아있는 소리들이 주는 여운과 문장에서 느껴지는 메시지가 한참 동안 내 마음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나는 살아가면서 얼마만큼의 양심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아쓰코는 당연히 올바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느끼는 양심이다. 누군가는 그냥 살아가면 되지 자살까지 할 일이야? 라고 말할지도 모르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사라지게 될 찰나의 양심일 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양심이 선택한 결과가 미래에 어떻게 영향을 줄지는 모르는 일이다.
인류는 꾸준한 상상력과 발전을 통해 높은 의식 수준의 인류로 거듭난다. 과거의 나의 뿌리가 인간의 끊임없는 생명력으로 돌고 돌아 내가 되었다면 지금 나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또 다른 나로 환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먼 옛날 조상들의 언어, 습관, 생활방식이 전해져 오면서 유전자로 남듯이 나의 행동, 가치관 등이 내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삶과 죽음의 반복, 일상 속의 무수한 선택이 미래의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지금 이 순간 가장 양심적이고 인간다운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먼 미래의 내가 강하고 슬픔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손은 나의 뿌리로부터 생명을 얻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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