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일상이야기

▶ 밥

by 달자

난 한동안 근대와 아욱을 구별하지 못했다. 비슷하게 포장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근대건 아욱이건 어차피 된장찌개 넣을 재료라 이름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것도 구분 못하냐는 타박을 자주 듣곤 한다. 굳이 정확한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원한다면 오징어종류도 마찬가지다. 낚시꾼 남편은 이름을 대충 부르는 것에 민감해서 한치나 갑오징어를 통틀어 오징어라 칭할라 치면 득달같이 내 말에 딴지를 건다. 내 눈엔 다 똑같은 오징어이고 주꾸미나 세발낙지나 내 눈엔 다 거기서 거기다. 손질해서 남은 것들을 냉동고에 넣을 때도 정확하게 라벨링을 해야 한다. 그동안 잡아들인 수많은 바다생명들을 일일이 열어보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정확한 이름으로 찾아줘야 남편의 힐난을 피할 수 있다.

그렇게 정확한 이름에 집착하는 건 어떤 이유인지 잘 모르겠으나 인간도 고유의 이름이 있듯이 우리 눈엔 다 비슷해 보여도 꿈틀거리는 아주 작은 생명체도 제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는 은근 철학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나? 하는 아주 찰나의 존경심이 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귀한 생명들을 잡아들이는 손맛을 즐기기 위해 낚시를 가고 결국은 우리의 양식으로 이용한다고 생각하니 앞뒤가 안 맞는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들에게 즐거움과 위로와 허기까지 채워주는 바다야 말로 경외심의 결정체다.

어쨌든 오늘의 아침은 근대와 두부를 넣고 바글바글 끓여 먹었다. 젊었을 때는 밥 먹는 시간이 즐거운 시간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맛이 있거나 없거나 그저 한 끼 때우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는데 내가 막상 밥 짓는 일을 하다 보니 밥이라는 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반찬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제 각각 이름이 있는 귀한 생명들이고 또한 인간을 살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거니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사랑과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밥 짓는 일에 관심도 없던 내가 나이 들수록 밥 짓는 일에 진심이 돼 가고 있다.




밥을 제때 챙기는 원초적 이유는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다.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영양소를 공급해줘야 한다. 사람들이 만나자마자 하는 일은 먹는 일이다. 이처럼 밥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밥이라는 것은 사람의 감정을 애타게 할 때도 있다.


아버님은 가끔 밥을 거를 때가 있다. 처음에는 속이 안 좋으셔서 그러시나 보다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이제 아버님을 조금씩 알아갈 때쯤 밥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수단이라는 걸 알았다. '지금은 안 먹을란다. 이따 먹을게'.. 열심히 움직이며 식사 준비하는 것을 번연히 보고 계시면서 막상 안 드신다고 하셨을 때 나의 처음 마음은 기분 나쁨이었다. 처음부터 안 드신다고 하셨으면 굳이 나 먹자고 바쁘게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후, 기분이 언짢으셨다는 걸 아차 싶게 느꼈다. 예민해지고 소심해지는 노년기에 별 뜻도 없는 자식들의 말이 가슴에 섭섭함으로 박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 대놓고 말은 못 하고 밥을 거부하는 것으로 의사표현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예전부터 밥이 감정의 수단이라는 걸 자식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장사를 시작했으니 아이들에게 밥을 제대로 해줄 수 없었다. 아이들은 거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인스턴트 음식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은 한참 늦은 밤 시간이었다. 대화는커녕 집안 일하고 얼른 재워야겠다는 생각만 했을 정도로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부모와의 끈끈한 유대관계없이 청소년기를 맞이했다. 그렇다 보니 아이의 사춘기가 도래했을 때 어떠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무엇이 힘들고 무엇이 불만인지 짐작으로만 알고 있었기에 그 짐작이 사실로 드러날까 봐 두려웠다. 내가 어쩌다 가끔 해주는 집밥은 맛이 없다는 이유로 늘 거부했다. 나는 내가 하는 음식이 별로구나 싶었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달았다. 아이들은 불만으로 가득 찬 마음을 엄마가 제일 가슴 아파하는 것을 이용함으로써 그 감정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 이후로 다 커서까지 아이들은 집밥에 관심이 없었다. 아이들은, 밥을 안 먹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엄마의 애타는 마음을 어떻게 읽었을까? 그 애타는 마음을 알아챌 날이 올까?

지금도 여전히 그때의 표정, 말투, 행동, 밥을 거부하는 일, 그러한 것들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몸에 배어있다.




나의 하루 시작은 자식의 감정이 어떠냐에 따라 좌우될 정도로 웃다 울다를 반복한다. 감정은 전염된다고 했다. 자식이 웃으면 나도 웃고 자식이 울상이면 나도 하루종일 기분이 안 좋다.


먹기 싫어도, 설령 맛이 없어도 맛있게, 정말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나는 제일 좋다. 내가 그걸 알기에 부모님 앞에서는 입맛이 없어도, 배가 터질 정도로 배불러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식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 보면서 살아도 나는 여한이 없겠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살아야겠다는 의지이고 엄마가 해준 밥을 먹는 것은 사랑을 먹는 것과 같다.


식사.png


*모든 이미지출처는 pixabay 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