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서운 놈
독감 때문에 일상이 깨져가고 있다. 감기 증상을 버라이어티하게 겪고 있는 식구들 때문에 난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저기서 대차게 콜록대는 소리에 난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쇠약해지신 아버님이 제일 걱정스러워 새벽에 일어나 죽을 대령 해도 먹기 싫다 내치시고 뜨거운 물이라도 드셔라 해도 싫다고 하신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내게 유방암 3기라고 했을 때 진짜 우습게도 슬프지 않았다. 이제 좀 쉬겠구나 싶어서였다. 암 덩어리가 몸에서 극성을 부릴 때 사실은 일상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저 이물감이 있을 뿐 나의 일상을 몇 년 동안 하루도 쉼 없이 잘해왔다. 어떻게 병원에 가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쉬고 싶은 마음에 갔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난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암인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 내심 그럴 줄 알았다며 무심하게 끄덕였다.
조직검사로 암이 판명되면 커져있는 덩어리를 일단 줄이기 위해 항암주사를 맞아 혹을 줄인 후 수술을 받는다. 난 다행히 크기가 확 줄어들어 무사히 수술을 받았다. 림프전이가 있었기 때문에 수술 후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몇 차례의 치료 후에 추적관찰에 들어가면 몇 년 동안 정기 검진을 받으면 된다. 아파도 기계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다. 암은 나의 왼쪽 가슴에 상처를 남겼고, 온 집안 식구들을 눈물과 걱정 속의 세월을 보내게 했고, 만나면 으레 병원은 언제 가느냐가 인사가 되었다. 그래도 난 괜찮았다. 치료받는 동안 다른 걱정은 뒤로 하고 내 몸만 생각하면 됐으니까.
구토, 설사가 일상이 되어버려 도대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밥 한 숟가락 넘기는 게 왜 어려운 지는 암환자만 안다. 하루종일 불편한 속과 두통, 누울 수도 앉아있을 수도 없는 몸 상태. 이런 딸을 보는 엄마의 고통을 말해 무엇하랴. 치료시작 후 2주가 지나면 온몸의 털은 다 빠진다. 엄마에게 머리를 밀어달라고 했을 때 난 참으로 못할 짓을 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머리카락이 빠질 것을 알면서도 안 빠지는 사람도 더러 있다는 말에 혹시 내가 거기에 속하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에 계속 미루었었다. 하지만 머리가 그냥 빠지는 것도 아니고 빗을 때마다 한 움큼씩 빠진다. 그냥 숭숭. 나는 눈물을 겨우 참고 빡빡이가 된 내 머리를 보고 바보처럼 웃었다. 엄마는 딸의 머리를 밀면서 눈물을 삼키느라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암환자의 고통을 잊어가고 있다. 아니, 거의 잊어버렸다. 하지만 엄마는 나 때문에 우울증이 왔다. 아픈 자식을 돌보는 부모의 아픔과 간절함이 더 큰 고통임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밥을 턱 밑까지 대령하는 데도 못 먹겠다고 하시는 아버님이 살짝 미웠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다 쏟아부으며 만든 식사이건만 "됐어, 안 먹을란다." 이 한마디로 정 없게 손을 휘저으시고 누워계시는 모습을 보고 조금이라도 드시면 되지 왜 내 정성을 무시할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차려놓은 밥상머리에서 한 숟가락을 겨우겨우 먹는 내 모습을 보던 엄마는 보다 못해 "너 그렇게 먹을 거면 집에 가라"라고 하셨었다. 그러던 차에 엄마가 우울증으로 밥 한 술 못 먹고 끼니를 거르던 때, 엄마가 제일 먼저 한 말이 "네가 밥을 못 먹는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라고 하셨다. 그렇기에, 쑤욱 넘기기만 하면 되는 밥이 왜 목구멍으로 안 넘어가는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아는 사람이다.
옛날 생각이 번쩍 들었다. 입맛 없는 사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싶어서 미운 마음을 접고 도로 가지고 나왔다. 먹기 싫을 땐 세상이 뒤집어져도 먹기 싫은 거다. 한 숟가락 목구멍에 넘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기에 지독한 감기에 난 무릎을 꿇었다. 밥이 대수랴. 내가 먹지 뭐.
그나저나 밥을 먹어야 살 텐데 어찌할꼬. "얘, 콜라 한 잔 다우. 속이 영 안 좋다." 평생을 소화제처럼 드시던 콜라를 달라고 하신다. "콜라 먹으면 속이 편햐." 정말 맞는 걸까? 그냥 맘이 편한 걸까? 어디를 찾아봐도 콜라가 소화제 역할을 한다는 말은 들어보질 못했다. 그렇다고 믿으면 진짜 그렇게 되나 보다. 하루의 끝을 콜라 한잔으로 마무리하시는 아버님은 콜라가 만병통치약이다.
사람은 삼시 세끼를 꼬박 먹어야 한다고 누가 정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암치료받는 동안 아주 조금만 먹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먹고 토하는 데도 그럭저럭 유지되는 걸 보면 몇 끼 굶는다고 당장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버님은 올해가 지나면 90세 하고도 한 살을 더 드신다. 이승에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아버님의 마음속에는 어떤 말들이 가득 차 있을까?
하여간 독감이라는 지독한 놈에 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코로나 앓았을 때도 잘 버티신 울 아버님이다. 그때보다 더 지독하게 앓고 계신 아버님이 얼른 쾌차하셨으면 좋겠다. 콜라보다 못한 내 음식과 두 손이 민망해지려 한다. 뭘 먹어야 똑 떨어질까?
놀러 다니며 독감을 달고 와 여기저기 전염시킨 남편의 기침소리가 오늘따라 귀에 거슬린다.
남편이 미운건지, 독감이 미운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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