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에 주눅 들지 않도록.
이른 아침 내가 제일 먼저 맞이하는 손님은 비둘기들이다. 베란다 난간으로 푸드덕 착지하는 비둘기의 특이한 저음의 울음소리가 어떨 땐 반갑기도 하고 어떨 때는 공포스럽기도 하다. 창문을 두드리며 쫓아내려 해도 듣는 척도 안 한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신을 숨기기는커녕 구구구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비둘기의 시선과 마주칠 때도 있다. 비둘기의 눈동자는 작고 날카롭다. 왠지 내가 더 약자인 기분이 든다.
시원한 가을에는 창문만 열면 훤히 보이는 바깥세상을 뻥 뚫린 베란다 난간에 서서 한참 바람을 맞곤 한다. 높은 층이라 아찔하지만 난간에 기대 어지러운 땅을 훑어보고 햇빛에 반짝이는 하늘을 우러러보는 기분은 꽤 괜찮다. 단지의 숲을 내려다보는 나의 느낌과 하늘을 나는 비둘기의 느낌이 어느 한 지점 같은 순간이 있을까?
아버님은 폐렴을 잘 버텨내셨다. 입이 꺼끌 하다며 죽도 마다한 아버님이 갑작스레 라면이 드시고 싶다 하신다. 와, 드디어 입맛이 돌아왔나 보다. 라면이라니. 라면의 냄새는 노인의 입맛까지 살리는구나 싶었다.
어떤 라면을 끓여드려야 할까? 그 많은 종류의 라면 중에 어떤 것이 그나마 건강에 나을지 한참 고민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삶 쪽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 있고 죽음 쪽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 있다. 삶 쪽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건강은 물론 식구들의 안위가 늘 고민이다. 미래의 걱정까지 보태면 인간은 어쩌면 하루종일 고민 속에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삶을 선택한 사람은 고통과 닥치는 문제를 피하지 않고 헤쳐나갈 에너지가 충분히 있다. 하지만 죽음에 더 강하게 이끌리는 사람은 죽음 후의 안식을 미리 설정해 놓는다. 죽으면 모두 끝이니 모든 걱정에서 해방되겠구나 싶은 마음. 인생에서 걱정하는 마음만 빼도 더 건강한 사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건강이 중요한 이유는 나의 의지대로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무언가 먹고 싶을 때 손을 뻗을 수 있는 것, 내가 일어나고 싶을 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어날 수 있는 것, 내가 생각한 것을 바로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이 깨지면 누군가의 손발이 필요하고 자신을 긍휼히 여길 만한 연민이 필요하다. 유교사상에 못 이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사랑을 소환해 줄 만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연한 보상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늙음이 추함으로 보이지 않게 인생을 잘 가꿔야 한다. 아름다운 노인이 되기란 정말로 힘든 일이다. 인간의 생존 본능이 너무 처절하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을 쉽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을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건강 외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 물론 돈이 중요하다. 사람을 고용하고 하다못해 기계를 빌려서라도 나를 지탱해 줄 수 있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줄 만한 것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 내 곁의 누군가 진심 어린 위로가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누가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쪼개서 남을 위해 위로해 주겠는가? 억지로 짜낸 위로는 침묵보다 못하다. 그 고독을 이기려면, 자신의 정신력을 지탱해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급작스레 찾아오는 고독은 심장까지 쪼그라들게 한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육신의 고통과 마음의 고독. 나는 눈앞의 표본을 보면서도 아직 먼 이야기처럼 방관하고 있다. 온몸을 파르르 떨게 하는 늙음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도 '나는 설마 그렇게 되지 않겠지'라는 자만이 있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그 과정에 내팽개쳐져서 여생이 힘들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고 지독한 현실이다.
세상이 두려워 움츠린 사람과 나이 들먹이며 큰소리치는 사람의 어느 중간지점에 와 있는 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섞이고 잘 늙어가기 위해 자연과 하나 되고 가까운 사람에게 미소를 전하며 내 몸을 단단히 조이고 마음의 근육을 팽팽하게 잘 단련해야 한다.
비록 느리게 굴러가는 나의 정신과 몸이 과부하가 걸려 터질 것 같아도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해져야지. 그리고 웃자. 감사의 환희로 물들 때까지..
베란다 창 틈새로 어두운 밤하늘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 어느새 잠으로 빠진다. 똑딱똑딱 우주의 시간이 흐르고.. 검은 밤의 구름 속에 환한 달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내일은 더 꽉 찬 얼굴로 날 바라보겠구나. 고맙다.
오늘도 무사히 지켜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