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 쌓기
외출 준비를 위해 모자를 눌러쓰고 늘 입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산책은 좋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다. 그냥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나가고 싶기도 한데 옷을 갈아입는 것부터 귀찮아진다. 귀차니즘은 내가 울음을 터뜨린 날부터 몸에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이 나이까지도 꼼지락 거리게 만든다. 손이 느린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기 싫은 이유를 대느라, 더 미루고 싶은 마음에 어차피 시작하면 잘 해낼 거면서 시작이 늘 어렵다.
겨울 같지 않은 날씨. 이런 날은 하루종일 걸어도 괜찮을 것 같다. 금방 봄이 올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마음이 살랑거렸다. 호수의 반은 얼어있고 반은 잔잔하게 햇빛을 반사하며 흐르고 있다.
얼음 위를 걷는 오리를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얼음 위를 걸을 때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뒤뚱거리기는 마찬가지다. 못 보던 아기오리도 보인다. 어설프게 날갯짓을 하는 아기오리를 쓰다듬고 안아보고 싶어진다.
겨울의 나무들은 앙상하게 씨를 품고 있다. 그 모습이 처연하면서 강인해 보인다. 재난을 당한 폐허처럼 모든 푸른 것들은 사라지고 지푸라기만 잔뜩 쌓인 대지에 참새떼와 오리들이 무언가를 쪼아 먹고 있다. 지푸라기 속에 어떤 먹이들이 있을까?
크게 심호흡을 하고 팔도 소심하게 휘두르며 오래도록 걸었다. 내가 하루하루 쌓아가는 이 길 위의 발자국들이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하는 흐뭇한 발자국이라면 좋겠다. 육체와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키보드를 누르다 보면 삶이 사라로 쳐질 때가 있다. 그럼 뇌는 바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낸다. 사랑, 삶이라는 거대한 통 속의 여러 감정 중 하나. 나는 사실 아직까지도 사랑이라는 개념을 잘 모르겠다.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사랑이라는 것을 반쯤은 통달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과연 얼마나 있는지 내가 못 미더울 때가 많다. 왜냐하면 사랑과 동시에 미움이 튀어나올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면 당연히 사랑만 가지고 살아야 된다고, 절대 싸우면 안 된다고 고지식하게 믿고 살았었는데 살다 보니 절대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의 개념은 잘 모르겠지만 미움의 개념은 확 이해가 된다. 미움은 증오보다 약한 감정. 미움은 어느 순간 연민으로 변할 때도 있다. 그 전환점의 계기는 오래 살을 부딪히며 살아온 그 사람의 기본 성향에 대한 믿음에 있다.
내가 버티고 살다 보면 또 살아지는 삶. 뜨거운 태양이 구름에 가려져 달처럼 보여도 그건 둥그런 해가 맞고 호수에 너울거려 일그러진 해도 분명 해가 맞듯이 이렇게 살아도 내 삶, 저렇게 살아도 분명 내 삶이다.
뜨거운 태양에도, 사랑이라는 개념에도 명확히 닿을 수 없듯 나는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계산 없이 사랑할 자신은 없다.
사랑한다면 어떤 계산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사랑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다. 사랑은 당연히 희생이 동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마음은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은 희생과 보상을 동시에 떠올리니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보상을 바라는 거는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누구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의지에 따른 행동에 내 본능은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바란다. 나의 정성과 노력을 희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로부터 그 희생에 따른 대가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당연시하는 행동이 느껴질 때 미움이 싹튼다. 그 미움을 떨쳐내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 내 정성이 부정당하고 돈 몇 푼으로 환산될 때 내 진심은 무력해진다. 미련스럽고 무딘 나는 그 미움이 사랑이라고 뒤집어쓴 감정으로 금세 바뀌기도 한다.
죽 끓듯 감정의 용광로가 끓어오를 때, 한 가지 감정이 제멋대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갈 때 마음을 통제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차라리 고맙다는 말이 더 가슴에 와닿을 때가 있다.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자주 들으면 거북하고 가끔 들으면 서운하다. 당연하지만 당연하기 때문에 강요당하기는 싫다. 그래서 고마워 한마디면 족하다.
누군가에게 보이는 내 행동이 이기적으로 보일까 봐, 내 계산이 보일까 봐, 진심이 거짓처럼 보일까 봐, 난 그게 싫다. 사랑이면 사랑다워야지. 사랑에 거짓이 없길 바라기 때문에 난 자꾸 내 속을 감추려 든다. 사랑은 사랑 그 순수함 자체로 보이고 행하기를 원한다. 내 마음이 그러라고 한다.
호수에 반사된 해를 보니 켜켜이 쌓이는 쓸데없는 내 감정처럼 일그러져 보인다. 이런 쓸데없는 감정을 싹싹 모아 몽땅 태우고 싶다.
내 시간을 촘촘하게 잘 쓰지도 못하면서 타인을 위해 쓰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나는 마음의 부담을 느끼다가도 닥치면 또 너무 열심히 쏟아붓는 내가 왜 이러나 싶을 때, 내가 뭘 위해서, 뭘 바라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내 양심이 이끄는 대로 투명하게 살아가는 것뿐이라고 나 자신에게 말하고 싶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질테니 그저 지금에 충실하기로 했다. 내 진심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