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괜찮아?
책 속 주인공에 심하게 빠진 날은 그 감정을 타고 식구들에게까지 전달된다. 마음벽이 얇은 탓에 주인공의 고통까지 떠안게 된다. 그러면 하루종일 기분이 가라앉아, 내가 왜 이러지? 갸웃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방은 절대 모르는, 죽을 때까지 만날 일이 없는 인물에게도 난 쉽게 감정을 쏟아붓는다. 그래서 그 인물의 감정에 동요되고 미리 감정을 예측하고 혼자 기뻐하고 슬퍼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에너지 소모가 크다. 내 속은 늘 혼자 무슨 조화 속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며칠 지나면 다 잊어버릴 책 속의 주인공이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허깨비처럼 떠돌고 있다.
방금 끝낸 책의 주인공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못생긴 형사다. 그런데 마음은 참으로 진국이다. 그의 아내는 그와 다르게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런 여인을 아내로 둔 주인공은 모든 남자들의 부러움을 산다. 하필 주인공의 딸은 아빠의 얼굴을 빼닮았다. 그래서 그 마음도 몰라주는 부모에게서 탈출했다.
주인공은 형사였지만 인사과의 농간으로 경찰 홍보부로 발령이 난다. 마음은 형사인데 몸은 홍보담당관이 된 거다. 사건이 일어나면 형사부는 말해도 될 것만 일러주고 홍보부는 기자들에게 사건을 알리는 역할이기 때문에 말하면 안 되는 것까지 요구해야 한다. 그래서 기자들과 홍보부는 싸우는 게 일이다. 항상 일급기사를 다뤄야 하는 기자들은 말해줄 때까지 홍보부에 요구한다. 어느 순간 주인공은 문득 사건의 밑바닥에서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인식하게 된다.
고위직 딸의 차에 치여 숨진 외로운 노인은 기자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오로지 고위직이 누군지, 그의 딸이 누군지만을 요구한다. 주인공은 범죄 피해자들의 외로운 죽음을 담담하게 호소한다. 그 울림이 눈물짓게 한다. 진심을 다해 마음을 전달하는 것. 그게 통했다.
"괜찮아?" 주인공의 아내가 되기 전 그녀는 못생긴 그의 이 말에 넘어갔다. 정말 숨 넘어가게 힘들 때 가만히 속삭여준 괜찮냐는 말이 결혼을 하게 된 이유였다. 진심이 통한 거다.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그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내 자존심에 금이 가더라도 그 순간만은 나를 낮춰야 한다. 온 맘을 다해 나를 죽이고 상대방의 맘을 건드려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도 마음을 보여준다.
사람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높낮이. 난 그게 제일 어렵다. 날 내세우고 싶고 내 뜻을 관철시키고 싶지만 설사 관철시키더라도 상대방은 겉으로만 알아들었을 뿐 속으로는 아니라고 한다. 오래 살다 보니 몸짓과 얼굴 표정만 봐도 느껴진다. 그때뿐이라는 걸. 시간이 지나면 도로 제 자리다.
지친다. 지치다 보면 포기한다. 포기가 길어지면 관계는 끝난다. 부모와 자식사이도, 친구사이도 다 마찬가지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날 버리고 상대에 맞추다 보면 감정 노동이 된다.
내가 이렇게 책을 읽으며 주인공에 빠지는 것도 감정 노동일 수도 있다. 웃기다. 나를 위한 독서인데 이렇게 힘들어서야. 공감을 넘어 내 감정까지 후벼 파고 있으니. 며칠 지나면 괜찮겠지.
지금 아버님은 서러움에 몸져누웠다. 폐렴으로 입원했는데도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가 나셨다. 버림을 받은 기분일까? 당연히 면회는 금지였다. 그 말도 안 통했다. 곡기도 끊고 자신을 고립시켰다. 자식을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이 그대로 박제가 된 옛날 사람. 나도 화가 났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그래서 잠시동안 모른척했다. 하지만 내가 졌다. 계속 그럴 수는 없었다. 방문을 열였다. 주름진 얼굴에 눈이 가려져 무서워 보였다. "아버님" 부르는 순간, "내일은 괜찮을 거다." 그러신다. 그래, 시간이 약이다. 안 오는 자식을 어떻게 하나. 내 맘대로 하기엔 자식들도 너무 늙었다.
아버님 마음에 가까이 가려고 난 최대한 나를 낮추었다. 40년 차이가 나는 아버님과 나와의 거리. 그 거리를 좁힐 수 없지만 아버님 생각이 틀렸다고 뻗대지는 않으리라. 그냥 아버님의 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머리를 식힐 겸 밖으로 나갔다. 달랑달랑 손에 들고 온 쓰레기를 휙 버리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가슴이 시원하다. 숨을 내뱉으니 마음이 뻥 뚫렸다.
해가 질 때까지 걸었다. 외투의 앞자락을 열고 모자도 벗었다. 휑한 머리쯤 누가 봐도 상관없겠지. 캄캄하니까. 어둠 속의 차가운 바람이 나에게 속삭인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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