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넌 원래 잘 웃는 사람이잖아
요즘 은근히 기대되는 시간이 있다. 뜨거운 믹스 커피를 홀짝이는 시간이다. 한참 장사할 때 문 열고 청소하기 전 믹스커피 하나를 쭉 찢어서 종이컵에 가루를 붓고 찢어낸 포장지로 휙휙 저어가며 먹었던 그야말로 다방커피 맛이 찐한, 그저 종이컵에 탈탈 털어 마시는 커피다. 뜨거운 물을 들이부어도 멀쩡한 종이컵이 늘 의문스럽지만 몇 해를 매일같이 믹스 커피를 마셨었다. 그 커피를 요즘 다시 시작했다. 밤에 잠을 설치기 일쑤라 피해야 하건만 그 시간이 왜 이리 기다려지는지 모르겠다. 그 짧은 시간, 시간도 아니고 홀짝 몇 번 하면 없어지는 순간. 요즘 친정아버지도 식사를 얼른 끝내고 과자를 먹을 생각에 마지막 한 숟가락을 끼니마다 남긴다고 남동생의 하소연을 들은 터다. 나도 아버지처럼 그런 단맛 중독에 빠진 건가?
커피를 마시며 눈앞에 보이는 모니터에 아주 오래된 음악을 띄워 놓는다. 귀에 익숙하고 능글능글한 노래를 들으며 커피를 홀짝인다. 현실은 눅눅한 방에 탁한 공기가 흐르지만 커피 향을 코에 가득 넣고 하얗게 함박눈이 내리는 창문밖 풍경을 배경 삼아 몸의 힘을 쭉 빼고 멍하니 음악을 듣는다. 어느새 신선한 숲에 자리 잡은 나무로 멋있게 꾸며놓은 카페에 와 있는 기분이다. 눈은 펑펑 내리고 온 세상은 하얗다.
달달한 커피가 좋은 건지, 조용한 잠깐의 시간이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 짧은 순간이 두 시간여 동동거리며 부엌을 오갔던 그 시간을 달래주는 마음속 허영심을 마음껏 부리는 순간이다.
꼭 닫은 창문을 살며시 열면 확 끼쳐오는 바람소리와 눈발들이 내 얼굴로 들이친다. 하얀 풍경을 찍기 위해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걸치고 몇 분 동안 사진을 찍었다. 추위도 잊은 채 시간이 멈춘 듯 초점에 집중하는 찰나, 훅 전해오는 순환의 느낌이 아련해지면서 몽환적이다.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마치 눈이라도 된 것처럼.
가끔 아무도 없는 공간에 나 홀로 일상을 누리는 시간이 온다면 나는 잘 지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루를 보낼까?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상상을 해본다.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있는 노년을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현실은 늘 쫓기는 기분과 시간을 허비한다는 죄책감으로 살아간다. 그렇다고 시간을 충만하게 사는 것도 아니면서 마음만 하루 종일 바쁘다.
이제는 마음을 비우면서 느긋하게 살아가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뭐든지 빨리하려고 팔다리를 마구 부려먹고 바쁘게 살던 시절은 뒤로 하고 이 시간부터 나의 새로운 기억이, 기분 좋은 추억이 쌓이도록 마음을 재구성해야 한다. 뇌는 늙어가는데 손 발은 관성이 붙었는지 계속 움직이려 든다. 뇌보다 손이 한 발 앞서 간다. 뇌가 시킨 일을 손은 알고 있지만 늙어버린 뇌는 손이 닿기도 전에 홀딱 잊어버린다. 허공을 맴도는 손. 건망증이 심해지면 냉장고에 손은 가 있지만 뇌는 이미 뭘 찾아야 하는지 잊어버렸다.
누군가 뇌가 명령만 하지 말고 팔다리랑 상의하면서 늙어가면 좋겠다는 문장을 읽고 한참 웃었었다. 뇌는 주인과 상의도 없이 더 빨리 늙어가고 손발의 신경세포는 뇌보다 젊다. 느려터진 뇌와 그나마 나은 손발이 나를 잘 지탱해 주면 노년은 덜 외롭다. 평생 일하는 손, 이제 아껴 써야겠다.
아침에 홀짝이는 단출한 믹스 커피,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햇살과 바람, 이런 것들이 내 옆에 늘 있었건만 난 무슨 대단한 것을 찾아다닌다고 그렇게 커다란 허상을 품고 기대려고 했을까?
난 오늘도 내게 위로를 건넨다. 잘하고 있어. 네가 가지고 있는 압박감은 단지 습관일 뿐이야. 얼른 벗어던져..
누군가 그러더라, 희망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고, 그저 마음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변 모두가 괜찮다고 말할지라도
당신의 마음은 당장 좋아지기 어렵습니다.
주변 모두가 괜찮다고 말할지라도
'나 정말 괜찮구나'라고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당신께 계속 위로의 말을 건네는 건
무너지지 않을 최소한의 지지선이 돼주는 일인 겁니다.
내가 아끼는 사람이니까.
지금의 일로 자신감을 잃어서는 안 되니까.
그래도 살아가야 하니까.
다시 한다면 정말로 잘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너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아.
하루를 행복으로 가득 채우고
전처럼 많이 웃고 그러란 말이야.
넌 원래 잘 웃는 사람이잖아.
- 최대호 작가 -
넌 원래 잘 웃는 사람이잖아. 이 말 좋다. 맞다, 난 정말 잘 웃었지. 입도 커서 목젖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말이야. 순악질 여사를 닮았다고 친구들과 깔깔대던 그때가 떠오른다. 하하핳..
- 25년 1월 27일 ~ 28일 * 눈이 펑펑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