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되는 꿈 (최진영)
내가 덩그러니 혼자가 되었을 때, 그 어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둠 속에 사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 빛을 봤고 그 빛을 따라 지금까지 왔다. 나는 그 빛으로 인해 살 힘을 얻었고 점점 약해지는 빛이 소멸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며 산다. 감은 눈으로는 꽃길인지 진창인지 알 수 없고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 발을 딛고 느껴봐야 알 수 있듯이 휘몰아치는 인생을 겪어본 나와 안 겪어본 나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숱한 경험을 가슴에 이고 살면서 사람과 글이 주는 위로를 받는다면 그 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나는 끝없는 나락에서 헤맸을 것이다. 그 나락에 빛을 쏘아준 사람, 사람들.. 허구이면서 진심을 담아낸 한 권의 책.
책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이들의 너무나도 현실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낀다. 나 같아서 그럴까?
이 책에서는 태희가 나온다. 태희는 어느 곳에나 있을 만한 사람이고 나 일 수도 있다.
'내가 못하는 거를 네 엄마가 하는 거고 네 엄마가 못하는 거를 내가 하는 거고. 언젠가는 네가 못하는 거를 네 엄마가 할 거고 네 엄마가 못하는 거를 네가 할 거고. 그런 거다. 사는 게. 지금이 영영일 것 같지만 나중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고.'
나는 내 시간을 사는데 거기 누가 들어오는 거야. 그런다고 내 시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해가 뜨고 진다고 시간이 가는 거겠나. 내가 알고 살아야 그게 시간이지. 네가 지금 부모를 원망할 수는 있어. 원망하는 그 시간은 어디 안 가고 다 네 거야. 그런 걸 많이 품고 살수록 병이 든다. 병이 별 게 아니야. 걸신처럼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게 다 병이지.
<내가 되는 꿈 中 할머니가 태희에게 하는 말 / 태희는 부모의 별거로 할머니 손에 큰다.>
내가 왜 딸자식이 낳은 딸까지 거둬야 하느냐고 할머니는 말했다. 나는 오늘도 할머니의 밥을 먹었다.
내가 손녀이기 때문에 할머니는 내게 바라는 것이 없다.
외삼촌은 할머니를 무시한다. 할머니는 멍청하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를 거뒀다. 할머니는 멍청하다.
이모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기를 사랑한다. 이모는 행복해서 유치한 사람. (태희 곁에 이모가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간직하고 싶은 기억 같은 건 없다. 나는 없는 것 같은데 없어지지도 않고.
나는 진짜 울어 본 적이 없다. 우는 나는 우습다.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겠지. 나는 서로 모르는 것과 서로 잊은 것을 기억한다. 오직 나만 우리를 망칠 수 있다.
나는 천사가 될 수 없다. 나는 악마는 될 수 있다. 모두 나를 견딘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지 않았다. (어린 태희가 쓴 편지)
누가 대신 살아 주지 않았다. 내가 살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과거는 꿈이 아니다. 나의 미래는 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모르겠다는 말은 지겹다. 이런 편지를 왜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모르겠다는 말은 정말 그만하자.
내가 여기서 잘 버티면 그곳에서 평안할까. 네가 거기 잘 있다고 상상하면 이곳의 나는 조금 용기가 난다.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지금과 같은 나를 상상한 적도 없다. 과거가 아깝다. 살아갈 날보다 내가 분명히 살아온 지난날이 너무 아까워. 겨우 이렇게 되려고 그렇게. (미래 태희가 쓴 편지)
못된 것을 배웠다. 무례를 권력처럼 썼다. 내가 지금 힘드니까 너에게 너무해도 된다고. 길을 잃은 채로 너무 오래 살아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사람. 이 회사를 나가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는 생각을 주문처럼 하고 있다. 길을 잃은 게 아니야. 길은 없는 거야. 먹고사는 건 중요한 문제다.
삶이 길이라면 돌아갈 수 있나? 과거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탈출하고 싶다. 어디로 달려도 현재에 갇혀 있을 뿐이다. 나로 계속 사는 건 지겹다. 일시 정지 버튼이 없다. (태희는 직장생활을 하며 상사에게 똥보다 지독한 모욕감을 느낀다고 표현했다)
바다에 비가 내리면.. 바다가 된다. 바다가 될 뿐이다. 무수한 물방울이 거대한 물에 합쳐질 뿐이다. 대체 무슨 소용이지? 물은 물이 되고 물은 다시 물이 된다는 게?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나밖에 될 수 없다는 게? 물고기는 물고기로만 살고 새는 새로만 사는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자 너무 갑갑했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지? 너무 따분하다. 세상은 칙칙한 해변과 먹먹한 하늘과 거대한 바다와 곧 바다가 될 빗줄기만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살면서 봤던 찬란하고 눈부신 것들은 모두 환상 같았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었다. 고함을 집어던져서 눈앞의 풍경을 깨트리고 싶었다. 깨트릴 수 없다면 금이라도 내고 싶었다. 금을 향해 내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내 안에 갇힌 나를 꺼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나는 나겠지. 마트료시카처럼 나는 계속 나일 뿐이지.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 같고, 이별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 같고, 포기를 위해 꿈꾸는 것만 같다. (밤새 사랑의 가슴앓이를 하는 이모와 바다를 보며 느낀 감정)
태희는 과거의 어릴 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모욕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비슷한 실수를 하며 비슷한 우울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과거의 엄마나 지금의 엄마도 마찬가지다. 어느 부분도 나아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태희는 할머니의 죽음을 보고 이모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무언가를 경험하지 않은 어제의 나와 무언가를 경험한 오늘의 나는 분명 다르고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했을 때의 눈물과 헤어졌을 때의 눈물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태희는, 그래도 불행하지 않다고 말한다.
♥ 작가의 말
'나는 한 명뿐'이라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이 삶을 혼자서 책임져야 한단 말인가? 그럴 때 여러 나이의 나를 떠올린다. 일곱 살, 열다섯 살, 스물세 살, 서른여섯 살과 마흔여덟 살, 쉰아홉 살, 기타 등등의 나를. 스스로가 너무 못마땅해서 끈적끈적하고 희뿌연 기분에 잠겨 버릴 때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와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여기 나는 무겁게 지쳐 있으나 거기 나는 상심을 털어 내고 웃고 있구나.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힘이 난다. 책임감이 조금씩 단단해진다.
다양한 시간, 다양한 공간, 다양한 우주에 내가 존재한다면... 어떤 세계에서 내가 슬퍼할 때 다른 세계에서 나는 기쁘다. 저 세계에서 내가 삶의 경이로움에 빠져 있을 때 그 세계에서 나는 전력을 다해 삶을 저주한다. 무수한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없고 유일한 나는 찰나의 찰나. 우주는 아주 넓고 깊고 신비로우므로 내가 유일하든 무수하든 상관없을 테고, 허무하긴 마찬가지다. 허무를 잊지 않으면 낙관할 수 있다.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담대해진다. 괴팍한 불안이 혼자 지껄이도록 내버려 두고 소설을 쓸 수 있다. 쓰다 보면 견딜 수 있다. (작가가 책의 마지막 장에 담은 말이 가슴에 콕 박힐 때가 있다.)
겨우 하루를 사는 동안에 느끼는 하루치의 글 속에도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매 순간 접하는 글의 온도와 표정은 마치 내 이야기처럼 닮은 구석도 있고,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글도 있고, 왠지 같은 마음이지만 들키고 싶지 않은 본능이 올라올 때도 있다. 마음의 밑바닥까지 드러나면 내가 너무 초라해질까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여러 갈래의 오묘한 감정의 형태로 바뀌며 글 속의 인물과 대화를 하듯 묵은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순간 힘들었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며 후련함을 느끼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래, 나도 너랑 같아.
나이 들수록 순수함이 떨어지고 주름과 비례하게 걱정이 늘어가지만 예전에는 몰랐던 모든 관계 속의 나를 더 가까이 끼워 맞추기도 하고 멀리 떨어뜨려보기도 한다. 그러면 미웠던 사람도 그럴 수 있겠구나 싶어지고, 내가 되는 꿈도 견딜만해진다. 태희가 태희에게 했던 말을 나도 나에게 해봤다.
"나는 불행하지 않다. 그래도 너는 행복하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