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 말 대잔치
오늘은 비가 내리네. 어제는 봄인가 싶게 적당한 기온이더니 말이야. 바람이 불 때는 춥다고 난리고 바람이 안 불면 산책하기 마냥 좋으면서 겨울이 맞아? 괜스레 내뱉어보는 소용없는 말들.
걷다가, 떨어질 듯했던 잎새가 사라락 아주 느리게 바람을 타고 내 앞으로 떨어져. 아직 생명이 가냘프게 붙어있을 나뭇잎이 하필 내 앞으로 떨어져 심쿵했지 뭐야. 바람에 살랑거리는 바싹 마른 잎사귀를 살포시 들어 원래의 나무 둔치에 옮겨놓아 주었지. 그냥 지나가면 될 일을 난 왜 한 자락 나뭇잎에도 감정을 담아내는지…
한적한 버스 정류장, 인적이 드문 이곳은 추운 날엔 더 고요하지.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뿐. 기다리면 정말 버스가 올까? 싶을 정도로 조용해. 갈수록 좋아지는 시절 탓에 뜨끈한 대기의자에 앉아 엉덩이 밑으로 손을 넣고 몸을 녹여.
기다리면 언젠가 올 버스이지만 곁에서 같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나 둘 다 떠나고 혼자 남은 텅 빈 공간의 서러움은 당해본 사람만 아는 감정이야. 난 그 감정을 많이도 느끼며 살았더랬어. 텅 빈 정류장의 공기가 블랙홀처럼 영원히 날 가둬버릴 것만 같은 공포는 생각만 해도 오싹해.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의자 깊숙이 허리를 밀착하고 자리를 잡았어. 아까의 서러움은 밀려나고 편안한 느낌이 찾아왔지. 언젠가는 당연히 올 거라는 믿음이 있어도 간사하게 오락가락한 마음이 겸연쩍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 웃음은 누군가를 잃고 정류장에 앉아 울었던 기억과 고통스러운 기억이 맞물려 자동으로 저장된 옛 기억의 결정체일지도 몰라. 웃기면서 슬픈 미소.
혼자이고 싶으면서 혼자가 싫은, 고독한 아침 공기가 좋으면서 저녁노을은 친구와 어깨동무하고 보고 싶고 같이 재잘대며 밥도 먹고 싶은 변덕스러운 나날들이야.
딸과 함께 친정으로 향했어. 아버지는 얼마나 호전되셨을까? 내심 기대를 안고 말이야.
띠리릭, 비번을 누르고 문을 여니 웃음이 절로 나오는 반가운 감탄사가 들려. "아이고, 내 새끼."
아버지는 이제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잘 걸으셔. 첫발을 땔 때 어둔한 감이 있지만 그 정도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간절함이 통했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와.
식사도 흘리는 것 없이 깨끗이 잘 드셨고 발음도 거의 정확했어. 난 미리 체념하고 예전처럼 안 될 테니 상황에 맞춰 운동하시라고, 왼손을 쓰시라고 일렀었는데 아버지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혼자 동영상을 검색하며 이것저것 오랜 시간 운동에 공들이셨다고 하시네.
검색이 더딘 아버지가 영상을 찾아가며 힘들게 따라 하는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지 뭐야.
내친김에 아버지 팔을 붙들고 공원으로 향했어. 따뜻하게 무장하고 천천히 더듬더듬 길을 걸었지.
언듯 보면 오른쪽 마비환자였다는 걸 짐작조차 못할 만큼 아버지는 잘 걸으셨어. 아버지의 걸음에 맞춰 걷는 동안 이런저런 아무 말 대잔치를 하다가 정체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잠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기도 했어. 이렇게 두서없는 말을 주절주절 떠들어대도, 얘들처럼 크게 흥얼거려도 민망하지 않은 편안함이 너무 좋았어.
걷다 보니 길가의 한쪽에는 낙엽을 쌓아놓은 봉투가 여러 개 보여. 가을까지 매달려 우리 눈을 즐겁게 해 주던 나뭇잎들이 왠지 쓰레기 취급당하는 느낌에 이상한 감정이 일었어. 가지에서 떨어져 누군가에게 밟히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건 부모님도 나도 모든 생명이 겪는 진리임을 새삼 느꼈지. 갑자기 모자 아래로 보이는 아버지의 흰머리가 내 눈이 확대경으로 변해서 뚜렷하고 진하게 보이더라.
가벼워진 나무는 건강하고 당당해 보여. 뚱뚱한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열심히 운동한 후 모두들 보란 듯이 웃통을 확 벗어버린 듯해. 멋있지?
소나무를 보면 솔향이 그윽하게 밴 송편이 생각나. 시엄니 살아계실 적에는 솔잎을 깨끗이 씻어 찜기에 편평히 쫙 깔고 송편을 예쁘게 빚어 쪄먹던 날이 떠올라.
솔향기가 온 집안에 풍기던 날, 난 그때 한참 며느리노릇하기 힘들다고 툴툴대던 때였지. 사 먹으면 될걸 뭐 하러 힘들게 앉아서 만들고 있나 싶었던 때였어. 그때는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았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솔향 가득하고 담백하고 쫄깃한 송편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건데 말이야.
도란도란 둘러앉아 이야기하면서 맘 편히 그 시간을 온전히 즐겼다면 좋았을 걸. 그때는 며느리 가르치려고, 부려먹으려고 일거리만 잔뜩 만들어댄다고 생각했었어.
괜히 자존심 세우며 나 잘난 맛에 뻐기던 젊은 날들이었지.
난 사실 부모님과 편해진 건 얼마 안돼. 엄마가 가족들 걱정에 늘 맘 상해 있을 때 내가 이렇게 무심하면 안 되겠구나 느꼈던 게 말이야. 내가 어렸을 적에도 엄마는 아팠고 지금도 늘 아프시지. 몸보다 마음이 아파서 늘 탈이었어. 병명도 모르는 아픔으로 평생 고생하셨지. 그래서 난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어, 오랫동안.
가끔 사랑한다는 말의 울림이 상대방에게 가 닿지 않을 때가 있어. 엄마가 너무 아플 때 누구도 당신의 아픔을 대신해 줄 수 없고 오로지 혼자 겪어내야 할 때 누군가의 사랑한다는 말은 성가시기만 하지. 당신의 아픔이 너무 크기 때문에 말이야. 사랑한다는 말은 상대방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여유 있어야 그 말의 힘이 발휘가 되더라. 너무 힘들면 누군가의 사랑해라는 말은 약하기만 해. 엄마가 그랬어.
그동안 엄마의 뒷모습만 보며 삭힌 감정만 가지고 살아온 나라서 엄마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볼 수가 없었지.
근데 말이야.
시간이 흐르니 그냥 자연적으로 알겠더라. 엄마가 그동안 행동으로 자식들에게 많은 사랑을 보여줬다는 걸. 그동안 난 엄마가 엄마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여자라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거야.
그걸 깨닫고 나니까 도저히 아픈 엄마를 그냥 보낼 수 없겠더라고. 빈말이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원 없이 해야겠더라. 그냥 자꾸 듣다 보면 나중엔 듣고 싶어 지게 말이야.
사람 사이에 있는 이야기를 다 끄집어내서 왜 그랬냐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헤아리는 일을 속 시원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묻어두고 지금 이 순간을 더 해피하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아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그냥저냥 흘러가더라. 나쁘지 않다는 건 다 지나고 나서야 그래도 살아지네? 그런 거지.
아마 친구들이나 남편은 지난 일을 들먹인다고 쩨쩨하다고 하겠지? 별일 아닌 것처럼 말이야. 난 별일이었는데.
참, 이상해.
미안해, 고마워 이런 말들이 분명 필요한 데 그런 말들을 다 생략하고 그럭저럭 살아지는 게 말이야.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해주면 마음이 다 풀릴 것 같은데.
달리 생각하면 나도 미안한 점이 많아. 그런데 하기가 싫어. 왠지 내가 더 당한 느낌이라서 그런 걸까?
그래서 그냥 퉁치고 살아.
어떤 사람은 부부관계는 괴기스러운 관계라고까지 말해.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처럼 시원하게 해결하지도 않고 묻어두고 살아가니까, 희한한 관계라고. 어쩌면 대놓고 미안하다, 고맙다, 이런 말조차 필요 없는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굳이 용서가 필요 없는 관계라서 그럴까?
암묵적으로 쌍방 합의관계지. 구차하게 그런 말은 생략하자, 뭐 그런 거.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이 듣고 싶어.
그런데 말이야. 올해가 가기 전에 엄마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이전에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보려고. 어릴 적 엄마에게 못된 감정을 가졌었다고 말이야. 그런 껄쩍찌근한 감정을 먼저 훌훌 털어내고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한다는 내 말이 엄마에게 닿을 것 같아. 엄마는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니까.
내 딸도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참 잘하지.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속에 담긴 오묘한 뉘앙스가 가끔 색다르게 들릴 때가 있어. 둔한 내가 다르게 느껴질 때는 약간 배신감이 들기도 해.
습관적이라도 듣고 싶은 말, 순수하면서도 계산적인 말, 듣고 난 후 한참 지나야 마음에 자리 잡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참 이상한 말이야.
모든 관계 속의 사랑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 요구에 따라 변하는 요물 같은 단어야. 차라리 구체적인 미안해와 고마워가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올해가 가기 전에 나 자신에게도 미안해라는 말을 먼저 하려고 해. 그동안 쓸모없는 나라고 구박했던 거, 못생겼다고 말했던 거.
그리고 올 한 해도 잘 참고 버텨냈다고, 고맙다고 말해주려고.
인생은 아무 말 대잔치처럼 유치 찬란하게 살면 돼.
고맙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