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리고 나

▶ 낯선 그대

by 달자

글을 쓰다 보면 어떤 한 글자가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이 글자가 이렇게 쓰는 게 맞나? 한참 들여다보고 자음, 모음을 분석해 봅니다. 늘 쓰던 글자이니 분명 맞긴 한데, 가끔 잘 쓰던 글자가 낯설 때가 있어요.


늘 가까이 있는 존재가 낯설어 보일 때, 퍼뜩 깨우쳐지지 않아 한참을 들여다보며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내 정신도 멈추게 되지요. 이상합니다.


사람도 그래요. 매일 같이 밥 먹고, 같이 자고, 같은 시공간에 머무는 사람이 낯설 때, 순간적으로 텅 빈 상태가 돼요. 깊은숨과 함께 마음이 철렁 내려앉지요. 그대의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지만 마음은 다른 말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도 그렇네요, 나도.

옆에 걸어가는 그대는 몇 년을 같이 살았지만 그대의 생각은 알 수 없죠. 생활하면서 순간적인 표정이나 기운으로 생각을 유추할 수 있어도 그동안 살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사는지는 알 수 없어요.


걸음이 빨라서 늘 내 앞에 있는 그대는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죠. 처음에는 쫓아가기 바빴지만 지금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가지요. 여자, 남자의 힘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이 표가 나게 마련이라 처음에는 나를 애처롭게 생각하다가 시간이 흐르니 '그것도 못해'가 되었다가 이제는 그냥 지켜보는 상태이지요. 애초에 여자, 남자 구분이 없는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살다 보니 무관심해져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네요. 전부였던 사랑이 서서히 반으로 줄어들고 어느 순간 공기처럼 늘 있지만 의식 없이 살아가는, 이젠 아내가 아니라 그냥 사람, 동료, 그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애초에 정을 무진장 퍼부었다가 갑자기 흐믈흐믈 사라지는 성향의 사람이구나 나름 그렇게 결론 내렸죠.


시작은 함께 했으나 끝은 서로 달라서 언제 헤어질지 모르지만, 서로를 할퀴고 미워했던 날들이 사는 동안 기척 없이 문득 떠오를 때가 많은데, 처음의 분노도 점점 희미해지고 가라앉아서 누가 들쑤시지 않는 한 이대로 묻어두고 살다가 마지막에는 깨끗이 사라져 정말로 순수한 사랑만 남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내 사랑에 대한 보상이 되려나요?


낯선 존재로 만나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낯설어지는 그대 그리고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가늘고 길게 잘 버티며 살고 있네요. 이제는 인간 대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만 남았어요. 자꾸 떠오르는 몹쓸 옛 기억은 오랫동안 끓인 곰국의 맛을 잡아주는 그저 후추 같은 것으로 남게 되겠죠. 미적지근한 내 인생에 확 뿌려진 알싸한 맛.



이젠 나를 사랑하자고 글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똑 부러지게 이제 날 사랑하게 됐어,라고 말할 수도 없어요.

나를 사랑한다는 게, 날 일으켜 뭔가를 수행해야 하고 나름 보람찬 하루였다고 토닥거려 주는 일이 꽤 에너지가 필요하더군요. 그냥 날 놔두기에는 흐르는 시간이 너무 아깝고 뭘 해보자니 절실함이 부족해 마음만 바쁘지 몸은 나른해서 밑으로 밑으로만 파고드네요.


훅 지나간 20대, 30대, 40대, 50대 그동안 난 뭘 했나..

그동안은 내가 없었어요. 그대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제일 어려웠기에 이어 붙이고 그냥 사느냐, 끊어내고 마느냐의 갈등에 내 온 정신을 쏟아부었죠. 그렇기에 현재는 모든 게 불완전해서 편함 속에 불편함이 있고 자유로움 속에서 억압이 있지요. 불편함을 털어내려고 애쓰는 데도 그게 잘 안 되네요. 이제 누구 눈치 볼 나이도 아닌데 말이에요.


결국은 난, 왜 태어났지? 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무엇을 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이켜보게 되고 나의 쓸모를 찾기에 이르렀죠.


내가 쓰는 물건 하나하나는 다 어떤 쓸모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난 어떤 쓸모로 태어났을까요?

조물주가 분명 인간에게 쓰임이 있다고 했으니 나도 분명 쓰임이 있게 태어났을 텐데, 답도 없는 의문을 붙들고 생각만 하죠. 그 답은 내가 찾아야 함에도 몸이 내 생각을 따라잡지 못하네요. 벌떡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아 우물쭈물 자꾸 뒤를 돌아보려 해요.

그러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고 난 늙어버렸네요.






날이 차요. 옷을 여미고 집을 나섰습니다. 찬 기운에 내 팔이 내 몸을 꽉 안고 걸어갑니다. 얇고 넓은 유리가 공기를 에워싼 것처럼 시리고 차갑네요.


호수의 살얼음 위에서 아무렇지 않게 노니는 오리들은 추위에 상관없이 앞으로 쭉쭉 나아갑니다. 장난도 치고 호수에 동그란 원을 그리면서 먹이활동도 하네요. 신기합니다.


바람을 따라 여유롭게 호를 그리며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들도 보이고 왜가리가 얇은 다리를 호수에 담고 긴 목을 접고 생각에 잠긴 모습도 보입니다. 휘익 휘파람을 부니 고개들 들고 자리를 이동합니다.


계절에 따라, 주어진 환경에 맞춰 제 할 일을 하고, 제 갈 길을 가는 자연의 생명들이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달자



오래 같은 공간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꽁꽁 언 마음이 스르르 풀리지는 않아요. 시간이 약이라고 해서 대화가 갑자기 잘 풀리지도 않죠.

사람의 성향은 변하지 않는 속성이 있어서 어느 한쪽이 맞춘다고 해서 완벽한 결말에 이르기는 어렵지요. 상대방도 노력하고 있구나, 서로 마음으로 느껴져야 겨우겨우 맞춰가는 거지요.


그대가 내 보폭에 맞추려고 좀 느리게 걸을 때, 그제야 나는 좀 더 빠르게 그대의 보폭을 따라잡으려는 마음이 든답니다.




©달자


이제 어두워지고 있네요. 어두워지고 바람이 더 세게 불면 우리는 손을 잡고 걸어야 합니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 체온으로 존재를 느끼고 따스함을 전해주어야 하니까요.


아웅다웅 서로 밀쳐내기엔 아까운 시간입니다. 그동안 외로웠던 고독은 밀어내고 남은 자리에 사랑을 담아요. 그러면 즐거운 고독이 찾아오겠죠?


서로의 눈동자에 맺힌 연민, 세월이 느껴지는 잿빛 흰머리, 굽어가는 어깨가 내 눈에 확 들어올 때, 마음에 이는 안쓰러운 감정들이 이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합니다.

불안함이 엄습할 때, 내 곁에 아무도 없구나 느낄 때, 그래도 그대가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는 되어주겠구나 싶어서 조금은 안심이 됩니다.


뒤는 없으니 앞만 보고, 지금 서 있는 이곳이 출발선이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새롭게 시작하면 되니까요. 해가 질 때 퍼지는 노을이 정말 아름답구나 오래오래 느낄 수 있도록 나란히 손 잡고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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