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해져라!
날이 좋다. 그동안 부옇던 하늘 때문에 기분까지 별로였는데 지금은 적당한 온도와 바람이 기분 좋게 한다. 남편의 걷자는 성화가 이제는 귀찮게 느껴지지 않는다. 못 이기는 척,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집 근처의 산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그래도 산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향했다. 길은 좁고 우수수 떨어진 낙엽이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길을 사람들이 걷기 좋도록 푹신하게 해 주었다. 주위는 온통 키 큰 나무들 뿐이다. 좀 황량한 느낌이라 이곳은 내 취향은 아니지만 한 번 갔다 오기는 딱 좋은 거리이다. 운동 같지 않은 만보 채우기는 그만인 단조로운 길을 가진 산.
운동이라 함은 그래도 숨이 차고 땀도 나야 하건만 이 산은 그렇지 않다. 나무만 빽빽한 야트막한 산이다.
겨울 내내 나무만 들여다보며 길을 걸었다. 여름은 어떠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겨울나무가 박력 있고 멋스럽다.
걷는 동안, 남편은 이런저런 말을 쏟아낸다. 난 그저 들을 뿐, 대답도 건성건성이다. 우리 부부의 일상이다.
리액션이 풍부한 아내를 만났더라면 더 신났을 텐데, 그게 좀 미안하다.
난 요즘 내가 해야 할 어떤 것들에 대해 미리 무기력해지는 증상을 느끼는 중이다. '하기 싫다'와 한숨이 습관적으로 흘러나온다. 집중력도 떨어져 독서에 몰입하는 시간도 짧아 금세 다른 생각들이 둥둥 떠다닌다.
차례 지내러 형님네 가서 이것저것 만들고 이야기하며 떠들던 시간들이 휙 지나갔다. 솟은 물가에 빡빡한 살림살이, 돈 벌기 힘들다는 푸념들, 자녀들의 시끌벅적한 소리로 오래간만에 웃음꽃을 피웠다. 술이 좀 들어가야 속을 내비치는 사람들의 밤 분위기와 다음 날 아침 분위기는 어제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정색을 하고 조용해졌지만 다투고 인상 쓰던 옛날보다 훨씬 마음은 가벼웠다.
친정부모님의 걱정이 머릿속에 늘 자리 잡고 있어서 요번에 가면 또 얼마나 늙으셨을까? 심란한 마음을 가지고 친정으로 향했다.
엄마는 이제 귀가 완전히 멀었는지 웬만한 말소리에는 반응하지 않으신다. 정말 세월이, 삶이 야속하다. 건강하실 때 자주 봤더라면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텐데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 처량했다.
아버지는 운동으로 많이 좋아지셨지만 일하던 사람이 집에서 시간을 버티려니 그 지겨움에 한숨짓는 일이 많아지셨다. 친구를 만나는 것도 멀리 나가는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인자했던 아버지의 미소가 이제는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고 건사하는 일로 고민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난 그저 잘 드시고 잘 지내시라는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고 아프신 부모님을 동생에게 떠맡긴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건, 서로 다른 점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뜨악하면서도 바로 수긍할 수 없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점들을 마주했을 때, 나는 그와 달리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었구나, 다 늦게 깨달았을 때의 난처함이, 그럼 그동안 난 잘못 살았나? 그런 자괴감까지 들었다.
나는 그렇게 살았어야 했구나, 난 참, 인생을 너무 가볍게 살았구나, 더 진중하고 더 힘을 쏟아 살았어야 했는데, 노력이 부족했구나 싶은 생각들이 걷는 동안 머리를 스쳐갔다.
그 정도면 됐다고 내 마음과 합의했는데 또다시 내 속을 들썩이게 만드는 사람들과의 대화, 다양한 사람들을 보고 느낀 감정들, 지나고 보니 그런 거였네, 싶은 장면들이 겨울나무를 보는 동안, 다시는 떠올리기 싫어 도리질을 쳐보기도 하고 단단한 나무의 몸통을 괜히 툭툭 건드리며 나를 다독여 보기도 했다.
앞에 걸어가는 남편은 어떤 생각을 할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다 말하기에는 아직 불안하다. 내가 가진 패를 다 보여줄 수 없는, 평생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는 멀고도 가까운 관계. 관심이 간섭이 되지 않고 걱정이 의심이 되지 않으려면 적당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추운 겨울을 온몸으로 견디며 살아가는 나무들을 자꾸 올려다보니 갑자기 허리를 굽히고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모든 게 부질없다고 흘려버리기엔 난 아직 할 일이 많다. 그 할 일을 제대로 하며 살아야 남이 살아가는 가치관에 대해 반박할 여지도 있을 것이다.
내가 넌 틀렸다고 아무리 지적해 봐야 날 지지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남이 인정해 주기를 은연중에 바라는 나의 자만심이 참으로 쓸모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러니 네 스스로 강해져라! 겨울나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