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간 시집_상실의 시간_ 18. 떫은맛

덜 익은 감을 마주하는 우리들의 자세

by oh오마주
배, 홍로, 푸른 부사 ㅡ 한 해 열심히 자란 과일이 되는 상상을 하며


떫은맛


흐트러진 머리에 집게 핀을 꽂았다

찬 이슬이 맺히는 한로에

개척한 마음을 수확하러

안고 앉아 눈과 손을 나란히 가만히

비 내린 창밖 다소 나른한 음악과 커피와 사과


덜 익고 따버린 푸른 사과 그리고 검은 점이 다섯 개 있던 홍로


푸른 부사 사과를 깎으며 한 사람이 떠올랐다

속살 깊게 붙은 껍질에 칼이 잘 들지 않아

두껍게 베어나가고 살은 적게 남았다

한 사람을 더 떠올렸다

그들이 나를 볼 때 눈빛과 손짓을 떠올렸다

매번 나는 예민한 사람인가 되묻게 하는 이차원적 동력

새콤하고 단단한 맛이 무보다 낫다 싶어서 와그작와그작

그런 삶도 같이 우걱우걱


소녀다운 홍옥보다 성숙해 보이는 홍로

깎자마자 큰 조각을 한입에 삼켰다

손가락에 묻은 달콤한 향기까지 끝까지 들이켰다

잠옷에 얇은 겉옷까지 걸치고 선풍기를 얼굴로 쬐며

달콤하며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좋아서 사각사각

그런 시간도 버무려서 아삭아삭


하나의 과일이 되는 상상을 한다

맛있지 않은 과일이 되면 어떨까

떫은 감이 되어본다

이르게 수확하여 부엌으로 들어온 겉만 번지르르한 감

아이고 예쁘네, 한 입 물었을 때, 으퉤퉤

벗겨진 감이 되어 그 못마땅한 표정을 보며

내 잘못은 하나도 없어,

억울해하는 상상을 한다

그 표정을 담는 눈과 마음이 잘못이려나

떫은 감에게도 세상 온화한 표정으로

넌 훌륭한 곶감이 되겠구나,

말해줄 사람을 만나는 상상을 한다

그 표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운이 좋다면

떫은 감에게도

못마땅해하지 않고

우습게 보지 않고

언짢아하지 않고

만남을 만족하며

안온한 시간을 도란도란

주는 이를 오늘 만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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