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게 되어버려서
인간 관계, 오해에 대해 적어둔 글. 적당한 거리둠이 꽉 잡고 있는 것보다 더 긴밀한 관계를 만들 수 있겠구나 느꼈었다.
“너는 원래 그렇잖아.”
‘넌 나를 가장 잘 알잖아.’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랬다.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를 잘 모르는 것 같을 때, 왜곡한다고 느껴질 때, 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 정말로 외로워진다. 화나고 서러울 뿐만 아니라, 외로워진다. 나는 상대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너는 나를 너무나 잘 알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부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아예 잘 모르는 타인이 나를 거부할 때는 ‘코드가 안맞나보다.’정도로 넘길 수 있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사람들과 거의 다 맞는 존재는 엄청 귀여운 강아지나 고양이정도는 돼야 가능할테니까.
문제는 비교적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이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가족이나, 친구나 애인과의 문제를 상상해보자. 상상만으로도 답답하고 우울해진다. “엄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나랑 너랑 지낸 시간이 얼만데 아직도 나를 몰라.” 등등.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때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어.’라는 반응이 나올 존재라면, 나는 아마 그 대상이 나를 당연히 알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 기대는 보통 깊은 소통과 대화에 기반하지만, 가끔은 함께한 물리적 시간이 길다는 이유만으로도 생기곤 한다. 지낸 시간이 오래 됐다는 이유로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을거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해하게 된다. 같이 주구장창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다해서 상대방을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함께 같은 공간에 있는 시간은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요소지, 그 자체만으로 더 잘 알게 될 순 없다. 관계란 지켜봄뿐만 아니라 교류가 필요하다.
나는 엄마, 아빠와 같은 공간에서 25년이 넘게 정말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도 부모님이 젊었을 때 무엇을 좋아하셨는지, 울게 하는 영화 장면이 뭔지, 기분이 꿀꿀할 때 먹고 싶은 음식이 뭔지, 어떤 글을 쓰고 싶어하는지, 어떤 나라로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지, 10대때 꿈이 뭔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을 잘 모른다. 왜냐,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
함부로 대한다는 건 편하기 때문이다. 편하다는 건 익숙하다는 거고, 익숙하다는 건 어느정도 파악했다는 거다. 그러나 인간은 복잡해서 완전 ‘파악’한다는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내가 누군가를 보며 ‘알아. 난 너를 알지.’ 자동재생 수준으로 생각해버릴 때 흠칫하자고. 익숙하다고 하여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정을 주면 믿고, 기대 심리가 생긴다. 내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나의 기분, 나의 생각을 잘 알아주길 나도 모르게 기대해버린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닌 다른 느낌의 나로 보면 나를 오해한다고 실망한다.
타인을 타인이 아니라 ‘내 사람’이라고 욕심냈을 때에 동시에 오해와 왜곡이 시작된다. 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사실 나 뿐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엄밀히 타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루종일의 기분을 알아채줄 수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볼 수 없다. 그러니 많이 서운하고, 이해가 안가고, 더 많은 걸 요구하고 싶다면. 잠시 타인의 시간으로 쉬었다 가자. 잠시 멈춤 버튼을 눌러 기대하고 싶은 마음 깊이를 멈추자.
한 사람을 제대로 알기에도 나는 아직 서툰 타인일 뿐이다. 알아가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 생명과 삶은 계속 움직인다. 나도 누군가를, 누군가도 나를 하나의 이미지로 ‘안다’고 확언하여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르는 사이보다 싸늘한 격차를 만들지 않기로 다짐한다. 계속되는 검정색의 덧칠보다는 백지로 돌아갈 용기가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