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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와우 Sep 21. 2018

느린 나에게 돌아오는 건

꿈을 정하는 시간까지 정해져 있을지도.


네가 느린건 나를 화나게 해


유치원때 기억이 난다. 과거에 집착하고자하는

건 아니다. 그냥 기억이 난다.


우리 반 선생님은 대부분의 기억이 다정한 느낌이었던 갈색 머리의 선생님이었다. 유치원 학기가 거의 끝나갈 때였다. 앨범 마지막에 아이들의 장래희망을 적어서 만들어야 했나보다. 유치원생 한 명 한 명 앞자리로 불러서 면담하듯 ‘네 장래희망이 뭐니?’ 물으셨다. 아이들은 빠르게 의사, 과학자, 선생님 등 대답했다.


나는 선생님한테 미움을 받고 싫어서 늘 눈치보고 칭찬받을 행동을 하던 유치원생이었는데, 그날따라 대답이 우물쭈물했다.


“저는 그림그리는 것도 좋아하고요...그리고 만드는

것도...”


“그러니까 네 꿈이 뭐냐니까?”


갑자기 윽박지르듯 나에게 되물으셨다. 많은 아이들을 상대하느라 지치셨던 것이다. 그리고 퇴근시간이 다가오는데 아직 많은 아이들의 장래희망을 들어야했을 것이다.


나는 놀라고 서러워졌다. 나는 선생님을 좋아했다. 예쁨받고 싶어했었다. 빨리 대답했어야했는데, 놀라서 더 우물쭈물했다. 목소리는 더 작아졌고, 선생님 목소리는 더 커졌다.


“그러니까 네 꿈을 말해줄래? 장래희망 말이야!”


우물쭈물과 답답하다는 듯 밀어붙이는 말투가 오가고 결국 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그럼 선생님이 그냥 패션 디자이너라고 쓸게.” 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간을 줄테니, 그 안에 꿈을 정하시오



느리다는 건, 특히나 제한시간이 정해져있는데 느리다는 건 누군가를 화나게 한다. 우리는 모두 죽음이라는 deadline을 앞두고 살고 있고, 쪼개면 아마 유치원생, 초등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사회인, 결혼, 출산, 육아, 퇴직, 노후준비 등 전반적인 사회가 따르는 마감시간이 있을거다.


그리고 그 작은 마감들에 지각을 하면, 암묵적으로 체크당하고 나의 늦음들이 내가 인간 인생의 평균 속도를 맞추지 못함을 보여주기에 ‘불성실하다’는 혹은 무리에서 ‘튄다’는 증거로 남을지도 모른다. 아니, 남는다.


나의 늦음에 화가나는 건, 나보다도 오히려 주변인이었다. 화내지 않는다면 답답해하거나 걱정한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 이미 ‘늦었다’며 걱정해준다.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나는 내가 상대평가를 받고 있으며, 아무도 모르지만 절대적으로 있는 것 같은 그 마감들에 쫓기고 있음을 깨닫는다.







“도대체 끝이 어딘데 다들 이렇게 달려요?”


“모르겠어. 그렇지만 모두가 달리는 걸.

우선 달리고 보자고. 저어기 뒤에 혼자 뒤처진 애들은 ‘실패자’ 낙인을 받는다고 하더라고. 어서 뛰자.”


“어떻게 한게 실패인데요?”


“낙오됐다는 거겠지.”


잘은 모르겠지만, 조급해보이는 그의 얼굴에 함께 뛰고 본다.







나는 20대 중반이다. 딱 20대의 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한참 어리다는 평을, 누군가에겐 이미 늦었다는 평을 받는다.


나의 머뭇거림은 누군가에겐 부러움이고 사치이자 동시에 한심하며 철이 없음이다.


이제 어떤 이야기를 나눌 때 에 대한 주제는 이제 이미 3-4년 전에 끝났어야 하는 주제처럼 느껴진다. 꿈을 ‘직업’이 아닌 ‘꿈’으로 이야기하는 건 점점 어색해진다. 이제는 내가 어디를 향해 서있는지보다 어떻게 적금을 들 것이며, 월급 관리를 어떻게 할건지, 집 장만은 어떻게 할 생각인지가 더 그럴듯한 주제들로 여겨진다.


나에게 직업은 내가 바라는 꿈을 이루는 수단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나의 꿈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너무 동떨어진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기에, 내가 원하는 적당한 선의 직업 설명과 돈을 벌 궁리에 대해 설명하는 법을 터득했다. 나를 향해 마감시간이 10초 남았다는 듯 윽박지르는 세상이 두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에.


종종 우물쭈물 나의 인생의 길에 대해 변명을 해야한다고 느낀다. ‘설명’이 아닌 ‘변명’.


나는 때때로 인생 자체가 무언가에 의해 평가받는 긴 면접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나는 행복이란 결과 딱지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 ‘아, 행복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꼭 받고 싶어. 행복 딱지.’


여전히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건지 잘 모르겠다. 나는 지금보다 보다 더 속도를 내며 살아야하는 걸까? 나는 지금 매우 늦어버린걸까?


이 기록은 좀 더 성숙해진 순간의 나를 바라며, 남기는 글이다. 20대 중반.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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