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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온 오리 Sep 10. 2024

잠수 3화

한기는 딱 한 번 걸렸을 뿐인데

“누가 왔어?”     


작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한기의 어둠과 정적을 깨웠다. 한기는 두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며 닫히지 않은 방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전등 불빛이 그나마 한기의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다.      


“한기 네가 추석에 여긴 왠일이냐?”     


한기는 엉덩이를 방바닥에 대고 질질 끌어서 작은 슈퍼 바닥에 발을 내딛었다. 

정말 이 바닥이 쓰레기통인 걸까? 한주의 말대로 나는 다시 이 쓰레기통에 스스로 던져진 게 맞는 걸까?     


“일 있어서 근처 왔다 들렸어요.”     


“응, 금방 올라가겠네?”     


작은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슈퍼 한쪽에 놓인 동그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더니 진열대를 여기저기 훑어 본다. 

한기는 밖으로 나가야 할지 다시 안으로 들어갈지 잠시 망설였다. 지금 올라간다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여기도 오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어야 하는 거라면 갇히지 않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사방에 벽이 없는 곳으로 가려 했다. 그런데 갇히지 않은 곳에는, 사방에 벽이 없는 곳에는 한기가 누워 있을 자리가 없어 보였다. 결국 몇 시간의 방황 끝에 이 시골집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추석 음식은 다 했어요?”     


작은 엄마는 대답 없이 진열대만 쳐다보고 앉아 있다가 힌기에게 눈을 돌렸다.     


“한주는 만나본 적 있냐? 네 엄마라는 여자는 연락은 되냐?”     


친척들 사이에서 한주의 이름과 내 엄마의 얘기를 꺼내는 게 금지된 줄 알았다. 20년을 그렇게 알고 살아 왔다. 그런데 작은 엄마 입에서 한주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네 엄마라는 여자’라며 내 엄마에 대해 물었다.

한기는 입술을 꽉 닫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작은 엄마는 한기의 멍해진 표정을 쳐다보더니 혀를 쯧쯧 찼다. 다시 진열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긴 네 아버지가 죽은 줄은 아는지 안다니? 너한테라도 연락이란 걸 하겠냐?”     


“갑자기 왜 물어여?‘     


작은 엄마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그란 플라스틱 의자에서 엉덩이를 천천히 떼고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어구야,“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게. 생전 명절날 이 집에 택배가 온 적이 없었는데, 모듬전 선물 세트에 비싸 보이는 과일 상자가 배달 돼 왔더라. 그거도 네 아버지 이름도 아니고 네 이름으로?“     


”그래서 그거 어딨는대요?“     


작은 엄마는 은색 현관문 앞으로 걸어가다가 멈춰 서서 한기를 돌아봤다.     


”네 작은 아빠가 서울 네 집으로 보냈는데 아직 못 받았냐?“     


서울 내 집이라니, 이제 거긴 한기의 집이 아니다. 한기와 10년을 함께 살았던 기억만 남아 있는 전 와이프와 아빠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아들의 집이다.     


”네 안사람한테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혹시 받았냐고 문자 메시지 보냈는데도 답이 없더라.“     


작은 엄마는 은색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바깥 바람이 휙 하고 새어 들어오는가 싶더니 금세 사라졌다. 

한기는 작은 엄마가 닫고 나간 은색 현관문을 쳐다 봤다. 한주가 말한 쓰레기 같은 집 안 안에 또다시 한기 혼자 남았다.                         






”재밌었니? 네 아들이 무슨 걸리적거리는 애완동물이라도 되니? 내가 무슨 너희들 대리모라도 되니? 내 차 안에서 그 여자랑 그렇게 낄낄거리고 희희덕거리며 즐거웠니? 당신이라는 인간은 정말로, 아무리 사람 만들어 보려 해도 사람 모양 근처에도 못 가는 미친놈이야.“     


희진이의 두 눈에는 경멸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기는 미안하면서도 왠지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차 안의 블랙박스는 갑자기 왜 확인 했을까, 싶은 의문만 들었다.      


”나가. 꺼져. 어차피 너 십 원 하나 없이 빈 몸으로 네 옷만 가지고 들어 왔잖아, 이 집에. 그러니까 들어 왔던 대로 네 옷만 가지고 당장 꺼져. 차라리 네가 없는 게 나와 호진이에게 더 좋아. 너랑 사는 거 자체가 불행이야. 너랑은 미래도 행복도 전혀 없어.“     


한기는 나갈 생각이 없었다. 처가에서 해 준 집이라 처음부터 희진이의 명의로 돼 있지만, 내 집이기도 했다. 내 집에서 내가 왜 나가야 하지 싶었다. 

가진 게 없는 집안에서 자라 혼자 힘과 노력만으로 닦아 나가는 인생이었다. 빈 몸으로 들어와 살았지만, 가장이란 무게감에 열심히 밖으로 돌며 돈을 벌었다. 

물론 돈을 버는 족족 전부 희진에게 다 가져다주진 않았다. 내가 번 돈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관리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많은 한기였다. 결혼 하고 나서도 친정의 여유를 야금야금 가져다 쓰고 있던 와이프는 백화점 VIP이기도 했다. 한기는 희진이가 호진이를 데리고 백화점을 거의 매일 들락거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뭐라 그러지도 않았다. 아니 뭐라 그럴 틈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기는 결혼하고 나서 매일 밖으로만 돌았다. 주말에도 일 핑계로 거의 집에 머무는 적이 없었다. 아침 일찍 나가면 거의 매일 밤늦게 들어갔다. 명절에도 희진이가 아버지 제사상을 차려 주면 호진이와 절을 올리는 게 다였다. 명절 당일 날만 집에 있고, 라운딩을 가거나 모임에를 갔다. 희진이가 호진이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도 희진이가 먹고 싶다는 음식이나 과일 한 번 사다 준 적이 없었다.     


”이 밤중에 그걸 어디서 사 와? 내일 네가 사다 먹어.“     


그 후로 희진이는 한기에게 뭐가 먹고 싶다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한기는 소파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요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런 한기에 눈에 리모컨이 들어왔다. 한기는 리모컨을 손에 들고 TV를 켰다. 리모컨에 있는 볼륨을 높였다. 높이고 높였다. 희진이가 뭐라고 하는 거 같았지만 한기가 키운 TV 볼륨 소리에 뭐라는지 들리지 않았다. 듣고 싶지도 않았다.

희진은 그런 한기를 쏘아 보더니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희진이 드레스 룸 안에서 뭘 하는지 한기에게는 TV 볼륨 소리밖에 안 들렸지만 느낌 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느낌의 앎이 한기는 너무 싫었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희진은 제일 큰 캐리어 두 개를 바닥에 끌고 나와 현관 앞에 섰다. 중문을 열고 한기를 돌아봤다. 한기를 경멸스러운 두 눈으로 쏘아보고 서서 뭐라고 하는 거 같았지만 한기의 두 귀에는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희진은 그런 한기를 소파에 내버려두고 큰 캐리어 가방을 끌고 대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날 밤, 희진과 호진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날, 한기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을 때 희진과 호진의 물건이 많이 없어진 채였다. 집 안에 무언가 많은 것이 비워져 있었다. 텅 빈 곳이 많은 채 무게감으로 버티고 있는 가구들과 전자 제품들만 한기를 맞이했다.

한기는 그때 알았다. 한주와 어머니가 아버지와 한주를 그 집에 내버려두고 나가버린 것처럼 희진과 호진이도 한기를 내버려두고 나가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한기는 그 집에서 나가줄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그날로부터 열흘 후에 희진의 변호사로부터 날아 온 이혼 소송 소장을 받았다. 이혼 소송과 상간녀 위자료 청구 소송이 한 사건으로 묶여서 왔다.

아버지에겐 이런 일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옆에 앉혀 놓고 다른 여자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그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낄낄거리며 재미를 봤어도 이런 소송을 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다섯 번의 상간을 저질렀어도 이런 소송을 한 적이 없었다.

바깥에서 상간을 저지르던 아버지가 한기와 한주가 빤히 쳐다봄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집에 데리고 왔던 날, 그날 어머니는 짐을 챙겨 새벽에 떠나 버렸다. 한주가 말하는 그 쓰레기 같은 집에서 나가 버렸다. 

어머니가 나가버린 지 한 달 만에 상간으로 인한 이혼 소송 소장이 날아 왔을 뿐이다. 아버지 경우는 그랬다.

그런데 한기는 딱 한 번 걸렸을 뿐인데 상간녀 위자료 청구 소송과 함께 진행되는 이혼 소장을 건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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