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보기 싫어도, 다는 안 맞아도 이 사람과 사는 이유를 찾았다면 된 거다
"미안해, 한 번만 믿어줘."
자존심이 쎄서 감정 표현도 거의 안 하는 그였다. 자기 애가 너무 강해서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그였다. 그런 그가 두 팔로 가볍게 껴안을 정도의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우리 집 앞 정류장에 아침부터 와 있었다고 한다.
나는 바위 같이 묵묵하고 무거웠던 그의 여린 모습에 흔들렸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한 번이 절대 한 번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왜 그래?"
누나의 결혼식이라고 양복을 쫙 차려 입고 종일 고생항 남동생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뭐지, 싶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개진 얼굴로 서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나는 예식이 다 끝나고 이제 막 생활 외출복인 캐주얼 정장으로 갈아 입고 내려온 참이었다. 그러다 카운터 입구에서 기막힌 얼굴로 아빠와 그를 힐끔거리며 서 있는 남동생을 발견했다. 나는 남동생의 시선을 따라 그와 아빠를 쳐다봤다. 그는 어린 아이처럼 얼굴이 진하게 발개져 있었다. 건드리면 울거 같았다. 그 옆에서 아빠가 지폐 뭉치를 들고 계산을 하고 계셨다.
"돈이 없대."
"뭐?"
"결혼식 끝나고 각자 손님 비용 각자 계산해야 하는데, 초등학생처럼 돈이 없다며 직원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거야. 그래서 아빠랑 내가 너무 당황스러워서 쳐다 보고 있다가 아빠가 500만원 대신 계산해 주시고 계셔. 이제 가족인데 어쩌겠냐며."
고속버스가 와서 내려가야 한다며 신혼부부가 리무진 타는 것도 보지 않고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내려가 버린 시댁 덕에 그는 혼자였다. 결혼식 준비 때도 그랬다. 시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란 사람은 돈이 없다며, 진짜 아무것도 안했다. 예물도 안했다.
엄마가 투자 용으로, 내 명의로 해 놨던 친정 근처의 소형 아파트를 내 주셨다. 결혼식 비용도 거의 다 우리 친정에서 냈다.
삼성역에 있는 첫날 밤 호텔 비용도, 예식 끝나고 호텔로 타고 갈 리무진 비용도, 태국으로 가기로 한 신혼여행 비용도, 웨딩 사진 비용도, 전부 우리 친정에서 댔다.
모든 걸 혼자 진행하고 책임져야 하는 그는 엄마가 그래도 이건 기본으로 해 줬음 좋겠다 한 함만 채워서 혼자 메고 들어 왔다.
그렇게 시작됐다.
백화점이 편한 여자와 백화점이 불편한 남자,
학원이란 학원은 다 다닌 여자와 학원 하나 안 다닌 남자,
도시에서만 성장한 여자와 시골에서 성장한 남자,
클럽이나 요란한 파티 같은 시끄럽고 화려한걸 싫어하는 여자와 볼거리 있고 즐길 거 있는 걸 좋아하는 남자, 심플하고 도시적인 옷차림을 좋아하는 여자와 화려한 디자인의 옷을 좋아하는 남자,
정리정돈 된 인테리어와 깔끔함을 좋아하는 여자와 그냥 손에 닿는 대로 흐트려 놓고 묻혀 놓는 남자의 결혼 생활이 그렇게 시작된 거다.
"누구세요?"
나는 4살 짜리 아들의 손을 잡고, 어깨에는 아들이 어린이집 가방을 들쳐 메고 이제 막 대문 앞에 도착 했다. 대문 앞에는 양복은 입은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와,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그 옆에는 그와 나의 결혼식 소식에 우리를 괴롭혔던 그의 전 여친이 서 있었다. 나와 그가 결혼하기 2년 전에 헤어졌다는 그 전 여친이었다.
나는 순간 불길했고, 언짢았다. 4살 짜리 아들의 손을 꼭 잡고 내 옆으로 더 바짝 끌어 당겼다.
"법원에서 왔습니다. 압류 진행 하러 왔습니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압류라니, 생전 살면서 그런 거에 연관돼 본 적이 없었다. 일원 한 푼 빚지기 싫어하는 친정 부모님 덕에, 형사 공무원인 아빠 덕에 나는 경찰서 갈 일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살아 왔다. 그런데 법원이라니, 그것도 압류를 진행하러 왔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그것도 4살 짜리 어린 아이가 있는 집에 미리 연락도 없이 이렇게 황당하게 급습을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일단 법원 직원 두 분과 집으로 들어갔다. 그이 전 여친만 복도에 세워 놨다. 그 여자가 내 집에 발을 들인다는 거 자체가 불쾌했다.
압류를 건 건 그의 전 여친이었다. 그리고 압류를 당한 건 그였다.
내부모님이 준 자가인 집이 내 명의기에 집을 압류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결혼한 부부라도 그럴 수 없다는 상식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법적으로 혼인 신고를 한 부부이기에 함께 쓰는 집 안의 물품들은 압류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헤어지기 전까지 같은 회사에서 일했어. 사귀면서 날 도와준 적이 있어서 내가 각서를 써 줬어. 그 각서를 이렇게 써 먹을 줄은 나도 몰랐어."
저녁에 집에 들어와 법원에서 준 압류 서류와 4살 짜리 아들과 갑작스레 맞닥드린 일을 얘기했더니 그가 한 얘기다. 그러면서 그는 나의 엄마가 백화점에서 전부 신형으로만 다 맞춰준 가전제품들과 가구들의 압류 금액을 다행히 갖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해결한다고 했다.
그때 이혼했어야 했다.
"내가 쉬는 날이 어딨냐, 주말에도 죽어라고 뛰어 다녀야 돈 벌지. 영업하고 사업하는 사람이 휴일이 어딨어."
아들과 나는 서로에게 껌딱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들은 아빠가 놀아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이미 마음을 놔 버린 거 같았다.
죽어라 뛰지 않으면 돈 벌기 힘들다는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 줬다. 빽도 없고, 시댁에 재산 한 푼 없고, 아버님도 돌아가시고 안 계시고, 혼자 힘으로 여기저기 인맥 넓히고 다니며 그래도 사회적으로만 성실한 그를 믿어준 내 잘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