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러의 일상 3
"회사에서 일 잘하죠"
정신과 선생님이 질문했다.
"못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어요."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는 열정이 넘치고 아이디어가 많다. 뷰티 브랜드 마케팅팀에서 일하는데 주로 기획 업무를 한다. 온라인 공식몰의 모든 웹 콘텐츠와 서비스를 구상하고 올리브영, 랄라블라에 들어가는 오프라인 매대와 제품 패키지를 기획한다. 여기에 PD처럼 라이브 방송 구성을 짜고 총괄하는데, 한 시간 분량의 MC 프롬포트 대본까지 쓴다. 이 밖에 자잘한 업무까지 더하면, 나는 단편적인 일보다 다편적인 일을 좋아하고 잘한다.
오지랖도 넓어서 타 부서 사람이 무엇을 물어보든 나서서 알려준다. 질문에 대한 답에 아이디어도 얹어서 준다. 그래서 나와 일하는 사람들은 나를 자주 찾는다. 나는 이들이 귀찮지 않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좋다. 비록 좋은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 이름으로 대표님께 올라갈지라도 직장에서의 모든 업무와 오지랖은 나만의 실력으로 차곡차곡 쌓일 거라 믿었다.
하루 8시간 주 5일. 쉴 새 없이 뇌를 쓰고 몸을 쓰고 모든 에너지를 직장에 쏟아부었다. 남들이 부탁하는 일도, 조금 어려워 보이는 일도 '그냥 뭐, 하면 되죠!'라는 유행어를 남발하며 밝게 일했다. 그러나 퇴근 후 현관에 들어서면 큰 한숨과 함께 침대로 슬라이딩했다. 그러면 이유를 모를 공허함과 두려움, 불안이 다가왔다. 그럴 때면 '열성을 쏟는 것은 당연해. 본업이니까.' 라며 스스로 합리화했고 잘 살고 있는 거라 믿었다.
그러나 이 굳은 믿음은 나의 조증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내가 다른 사람과 특히 다르다고 느낀 점은 이토록 하루종일 에너지를 쓰고도 잠을 자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면증은 자고 싶은 데 못 자서 피곤해 미칠 것 같은 증상이다. 그러나 조증은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다. 여기에 생각까지 많아서 이것저것 일을 벌인다. 말 그대로 프로 N잡러다. 꼭 돈을 벌어서 잡(JOB)이라기보다 취미도 본업처럼 해서 그렇다.
나는 뮤지컬 배우가 꿈이었다. 그래서 4년 만에 하는 뮤지컬 동호회에 진심이었다. 뮤지컬 new 그리스 작품을 준비했는데, 주인공 샌디를 맡아서 퇴근하고 나면 무대 위에 선 듯 대본을 한 번씩 돌리고 잠을 청했다. 그러면 새벽 3시였다. 내 본업이 배우인 듯 푹 빠져서 매일 개인 연습에 몰두했다. 여기에 주말에는 친구가 소개해준 형태소 분석 업무를 8시간 넘게 했다. 새벽에는 러닝이나 뷰티 콘텐츠를 찍기도 했는데, 이렇게 살다 보면 하루 수면시간은 2-3시간에 불과했다.
반 고흐처럼 이름을 널리 알린 예술가나 유명 과학자, 사업가는 조울증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들이 예술적 감각이나 아이디어가 살아날 때 잠도 안 자고 이를 실현시켰고, 그래서 성공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나도 조증일 땐 생각이 팽팽 돌아가서 정신없이 아이디어가 튀어나온다. 행동도 매우 빨라서 일처리가 신속해진다. 평소에는 생각을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해 기획안 쓰기가 버겁지만, 조증일 땐 떠오름과 동시에 손가락이 춤을 추듯 키보드 위를 날아다닌다.
일의 능률이 확 오른다는 측면에서는 조증이 좋을 순 있지만, 나를 보면 조증이라 성공했다는 우스갯소리는 못할 것이다. 약한 조증일 때는 그나마 괜찮지만, 심할 때는 뇌를 스치는 수많은 단어에 정신이 쏙 빠진다. 한마디로 미쳐버리겠다. 내 몸은 하나고 시간은 24시간이 모자라~인데, 하고 싶은 일과 대박칠 것 같은 일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뭐부터 해야 할지 우선순위를 못 잡고 갈팡질팡한다. 뭐 마려운 개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걸 갈구한다. 이렇게 뭔가 떠오를 땐 흥분되어 미치고 팔짝 뛰게 좋다. 놀이기구 타듯 짜릿하다.
운 좋게 또는 자기 통제 능력이 뛰어나 이 조증 상태를 잘 관리하면 진짜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보통의 결과는 아니다. 조울증 환자는 자신이 벌려 놓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조증은 통제도 힘들뿐더러 자신도 모르는 새에 찾아오고, 그 주기가 불명확하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 '역시 난 끈기가 없어. 나는 모자란 사람이야. 나 같은 애가 그렇지 뭐.'라는 자책과 좌절이 시작된다. 그렇게 조증이 끝나면 절벽에서 떨어지듯 끔찍한 우울증이 찾아온다.
정상적인 감정 기복은 평균에서 떨어져서 그 깊이가 깊지 않다. 그래서 쉽게 우울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우울증 환자는 약한 우울감에서 깊은 우울감으로 떨어져 그 깊이가 깊지 않다. 그래서 고통스럽지만 비교적 덜 위험하다. 그러나 조울증의 감정 기복은 감정의 최정상에서 바닥까지 곤두박질친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고 숨이 막히고 자살 위험이 크다. 그리고 공황 증세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다.
나도 프로 N잡러로 4개월을 살고는 번아웃과 함께 깊은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숨막히는 공황발작과 심장이 쿵쾅거리고 불안한 공황 증세를 수시로 경험했다. 이제 들뜨고 에너지 넘쳤던 조증의 시대는 끝났고 기나긴 우울의 시대가 나를 사로잡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