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지 않는 사회
대한민국에서 질문은 금기시된 불문율 같은 것이다. 질문한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첫 번째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너무나도 지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회다. 지혜가 아닌 지식 자체만 추구하다 보니 배움이 넘쳐난다. 매 해 신년 다짐 중 운동, 다이어트, 금연 등과 같은 건강과 관련한 다짐과 책 50권 읽기, 영어 공부 하기 등과 같은 지식 쌓기에 대한 다짐이 쌍벽을 이룬다. 이런 사회에 살고 있다 보니 못생겼다는 욕보다 무식하다는 욕이 더 무서운 사회다. 강박적으로 지식 쌓기에 몰두하고 책을 많이 읽는 것만이 마치 교양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 지식이 무엇에 쓸모 있는지도 모른 채 교육 현장에서는 주입식으로 일단 지식을 마구 욱여넣기 바쁘다. 상황이 이런지라 내가 모른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질문하는 것은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것이 정말 너무나도 자존심 상한 나머지 몰라도 모른다고 말하지 못하고 아는척하고 지나간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아시아권 국가들의 특징인 것 같다. 오죽하면 논어의 위정 편에는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 당시 지식인들이 얼마나 아는 척을 했으면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소크라테스도 역시 비슷한 말을 한 바가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 와서는 체면 문화를 중시하는 동양권의 문화가 더해져 모르면서도 아는 채 하는 너무나도 나쁜 버릇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DNA에 각인된 것 같다. 초등학교 때 나는 질문이 참 많은 아이였는데 질문이 너무 많다고 엄마가 선생님께 불려 가는 수준이었다. 그때 했던 질문은 초등학생으로서 가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왜 산 위에 올라가면 태양이랑 더 가까워지는데 더 춥냐 이런 질문이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야지 배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나 같은 사람은 사회 생활 하기 힘들다는 소리 많이 듣곤 한다. 두 번째는 질문한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어떤 상황에서 끼어드는 상황이 되는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흐름이 깨지는 것, 그 흐름을 깨는 누군가를 매우 불편하게 여긴다. 중견 장교가 되면 1년 간 교육을 받는 기회가 생긴다. 나는 이때도 질문을 참 많이 했는데 정말 많은 핀잔을 들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 왔는데 질문한다는 핀잔을 듣는 경우도 있었다. 괌으로 출장을 가서 미군에게 강의를 들을 때는 미군은 강의도 강의지만 질문하고 토론할 시간을 더 할애해 주었고 다양한 질문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미군에게 질문한다는 것을 불편해했다. 되레 질문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기는 미군과 달리 우리나라 장교들은 질문하지 않는 것이 예의고 미덕인 것처럼 행동했다. 아마 이것과 관련해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G20 행사 때 한국에 와서 폐막식 간 기자회견을 하는데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의 기회를 누차 줬지만 끝내하지 못했다고 하는 유명한 일화를 통해서 단순히 특정 직업군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그런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아마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이유 두 가지를 적었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분위기가 너무나도 뿌리 깊게 박혀있어서 우리나라는 질문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유명한 건축가이신 유현준 교수는 BTS, 오징어 게임이 세계에서 유명해지는 것을 보고 되레 씁쓸하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우리는 오징어 게임과 같은 콘텐츠를 만드는 나라인데 그게 아니라 넷플릭스를 만드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BTS도 좋지만 빌보드 차트를 만드는 나라가 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파운드리 공정을 갖춘 대한민국이지만 왜 우리는 팹리스를 갖출 수 없는가? 왜 우리는 늘 패스트 팔로워, 카피캣이 되어야 하는가? 질문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질문하기보다는 누군가 만들어놓은 틀에 순응하는데 정말이지 타고났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판을 벌려놓으면 그 판에서 그 누구보다 최고가 된다. 하지만 판을 벌리는 자체는 하지 못한다. 행정업무를 하다 보면 늘 누가 만들어놓은 양식을 Ctrl C + V 해서 사용하곤 하는데 이런 게 싫어서 내가 보고하고자 하는 내용에 맞게 문서의 형식을 완전히 바꾸곤 했다. 그런데 양식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반려당하기 일쑤였다. 물론 양식에 맞는 문서를 작성한다는 것은 마치 T.P.O와도 같기 때문에 필요하다. 하지만 그 양식이 내가 보고하고자 하는 논리에 맞지 않다면 당연히 양식을 바꿔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양식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내용을 그 양식에 맞추기 급급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의식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이 세 가지에 대해서도 질문하지 않는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주거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나라는 아파트 사회다.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나라는 이렇게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을까? 영문도 모른 채 너도나도 아파트를 사기 급급하고,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형성된 아파트를 마치 유일한 계층 사다리인 것 마냥 추종한다. 평생을 아파트 사는데 투자한다. 자신의 인생을 가꾸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보다 아파트를 구매하는 것이 더 큰 인생의 목적이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결혼했을 때, 삶에서 가치 있는 큰 성취를 이뤘을 때보다 내 집 마련이 더 극적인 사회다. 하지만 아파트는 우리나라 전통 주거 양식도 아닐 뿐 아니라 아파트가 이렇게 많아지고 보편화된 데에는 사실 매우 슬프고 부끄러운 근현대사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 면에서 어찌 보며 아파트는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맞지 않다. 21년 기준 우리나라에서 공동주택(아파트, 빌라 등)에 거주하는 인구 비율은 무려 63.3%에 달한다고 되어 있다. 영국의 경우 같은 해 단독주택(반단독주택 포함)과 같은 개인의 주거 공간(마당, 정원 등)이 있는 주거 형태에 거주하는 비율이 84.8%에 달한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영국의 여러 대학에서 연구한 바에 따르면 코로나로 인한 정신건강 문제가 생긴 비율 역시 이러한 개인 공간을 갖지 못한 하층민(특히 이민자)에서 주로 발생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주로 아파트에 거주하는 도심지역에서 되레 더욱 많은 우울증 환자가 발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하층민이 우리나라의 최상위 부자와 동일한 거주형태를 가졌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왜 우리는 고통받으면서도 아파트에 살아야 하는가 질문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