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을 정해놓은 사회
사진: Unsplash의Jacek Dylag
세상의 이치는 참으로 고약하다. 인간은 가장 고등한 동물로서 이성과 감성을 가지고 창조력으로 세상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그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물의 세계와 다를 바 없는 약육강식에 가까운 상태에 놓여있다. 그러다 보니 강함이라는 것,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은 마치 정답이 있는 공식처럼 되어버린 지 오래다. 답을 정해놓은 사회. 질문은 하지 못하고 답은 정해놓았다는 것은 사실 매우 전체주의적인 발상이다. 어떠한 권력자는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답은 정해놨기 때문에 그 답을 정하는 권력을 마음껏 휘두른다면 답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보통의 사람들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왜 도대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그 정답을 쫓아서 살아야만 할까?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인간이 이 지구를 지배하는 가장 상위의 고등 동물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가진 지능과 창조력 덕분이다. 신체적인 능력으로만 말하자면 우리는 작은 원숭이 한 마리조차 싸움에서 이기기 힘들 것이다. 하늘에서 공격하는 새 역시 아무 무기가 없다면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이러다 보니 이성적으로는 매우 고도로 발달하여 다른 동물들과 싸울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알고 있고, 만약에라도 싸워야 한다면 우리는 발달된 기술력을 이용하여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공동체에 속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한 개인으로서 한 개체의 동물로서 남게 된다면 본능적으로는 언제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겪은 생존에 유리한 방법인 공동체 생활이 우리의 DNA에 아주 깊이 각인되어 있다. 고대의 형벌 중 가장 무서운 것은 추방이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거나 군인들이 보호해 주는 마을 안이 아닌 미지의 광야로 추방된다는 것은 단순한 죽음 이상이었다. 차라리 교수형에 처해진다면 죽음의 고통이 눈 깜짝 사이에 이뤄지겠지만 광야로의 추방은 서서히 옥죄여오는 죽음의 공포를 기다려야 했고,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갈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것이 또한 고통이었다. 사나운 맹수에 의해 찢겨 죽임을 당할지, 질병에 의함일지, 기후에 의함일지, 아니면 우연히 마주친 타민족에 의한 것일지. 알 수 없기에 더욱 두려운 형벌이 바로 추방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 개인은 추방을 당하지 않으려고 질서에 순응하게 되었다. 공동체에 복종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공동체의 룰을 만드는 존재가 전혀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을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지금과 같은 풍요로운 시대, 인권이 보장되는 시대에서 조차 여전히 인간은 공동체가 만들어 놓은 질서 안에 편입되지 못하는 것이 엄청난 두려움으로 작용되곤 한다.
하지만 종종 나라에 따라서 그런 상황이 바뀌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특히나 서양의 경우 오랜 시간 억압과 착취를 받아온 민중이 어느 순간 깨우침을 얻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귀족과 권력자의 전유물이었던 지식이 인쇄술의 발달로 책으로 나와 세상에 보편적으로 보급되었다. 물론 그전에도 수도원 같은 곳에서 수도사들이 필사로 많은 지식들을 옮겨 적어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 노력도 있었다. 그런 과정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누적되고 축적되어 갔다. 권력자들이 정복 전쟁에 뛰어들 때면 여지없이 새로운 문물과 지식을 습득할 기회를 얻었고 그런 지식들이 전쟁에 참전한 시민들에게도 전수되기 시작했다. 깨닫기 시작한 민중은 더욱더 지식을 천착하였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세상의 변화를 위해 일어서기 시작했다. 프랑스혁명 같은 경우는 세기에 걸쳐 일어났다. 그런 상황이 전개되기까지 수세기에 걸친 억압과 착취, 민중의 깨달음이 있었고 촉발요인이 있었기에 지금의 서구권의 모습이 생겨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코로나19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 겉표면만 보고 서양도 별 것 아니네라던가, 지금의 프랑스 대통령이 연금 개혁을 시도할 때 프랑스 시민들의 시위를 보며 서양도 별 것 없네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을 그런 언론에 비친 표면만으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들은 절대 성장할 수 없다. 결국 인식하지 못한 노예의 삶이 계속될 것이다. 권력자가 만들어놓은 정답에 토를 달기 시작한 사회. 그렇게 질문하기 시작한 사회. 질문을 했기 때문에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있는 사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질문들이 또 연달아 나오고 그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논쟁할 수 있는 사회. 그리고 그런 논쟁의 결과가 그 시대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면 민주주의 법칙에 의해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가 되어야만 한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삶도 마치 일련의 정답이 있다. 공교육 12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을 보고, 좋은 대학을 가서 대기업에 취직하고 서른 즈음에 결혼을 하고, 신혼부부전세자금대출을 받아서 전세로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다가, 아이를 낳고, 10여 년쯤 직장생활 열심히 해서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주택 청약으로 아파트 분양을 받고,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고, 30년쯤 주담대 갚아나가며 직장 생활 열심히 하다가 50 ~ 60 사이에 퇴직의 압박으로 스트레스받으며 살고, 그러다가 은퇴하면 연금 받으면서 자식들에게 기대어 사는 일련의 모습들.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이러한 공식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심지어는 본인이 하는 일이 예술 쪽과 같은 평범과 보통에서 벗어난 삶이어도 결국 그들 역시 집을 사고, 노후 걱정, 연금 걱정을 하는 것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것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서 사회적으로 추방되지 않고 의료 보험과 같은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방법이다. 나 같은 경우는 흡연을 하지 않고 1년에 병원이라고 해봐야 몇 번 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가더라도 군 병원을 이용한다. 하지만 나는 한 달에 거의 20만 원 가까이 보험료를 내고 있다. 직장보험이라 그나마 저렴한 편이다. 그렇다면 이런 보험료는 누구에게 혜택이 돌아갈까? 애석하게도 하지 말라는 흡연을 하다가 암에 걸린 사람들에게 다 돌아간다. 물론 지금 건강하다고 미래에도 건강하리란 보장은 없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두려움이 있다. 의료보험은 강제로 내야 하는 국가 공권력에 의함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다면 나같이 담배 안 피우고 건강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보험료를 감면하고 흡연자들에게는 보험료를 강제로 더 매겨야 공평한 것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왜?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내가 그것이 이해 안 된다는 이유로 순응하지 못하면 나는 의료보험을 내지 않는 사람이 되어 직장에서 쫓겨날 것이고 사회적으로 추방될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 그렇게 살아도 만약 지금과 같은 건강이 유지된다면 전혀 문제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그것이 모두 확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확률에 의존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고 두렵기 때문에 결국 정답을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된다.
나와 사회에 대한 질문을 하기 전에 주입식 공교육을 거쳐야 하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 내가 배우고 싶은 것, 내가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일을 배우기보다 간판이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 게다다 종종 이런 정책들은 실패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청년에게 주는 혜택보다 신혼부부에게 주는 혜택이 더 좋지 않다 보니 내가 결혼을 왜 하고 싶은지, 결혼해서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지 질문하지 않고 그저 마치 그 혜택에 따름이 정답에 가깝다는 생각에 결혼하지 않는 사회 현상까지 생겼다. 아이를 낳는 것이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 아이를 낳아서 생명체를 성장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지만 또 축복인지 질문하기 전에 지금의 정책이 출산에 그리 호의적인 정책이 아니다 보니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한다. 주택 구매도 마찬가지다. 정책적으로 아파트에 유리하도록 되어 있으니 아파트를 살 수밖에 없다. 내가 어떠한 형태의 집에서 살고 싶은지 질문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내부 구성과 같은 인테리어에 대한 질문뿐이다. 이것은 마치 스펙 쌓기와도 같은 것이다. 내가 그 능력, 경험이 왜 필요한지가 질문이 아니고 토익 몇 점, 봉사활동 몇 시간이 더 중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질문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정답에 순응하는 사회를 만들었고, 우리 모두는 알고 보면 거대한 공정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 선택권 없는 삶으로 그저 거쳐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개인이 삶에서의 소소한 선택권을 주는 것 또한 보통의 사람들은 이 정도로 만족하라는 선택권에 불과할지 모른다. 설국 열차에서 만약 단백질 젤리가 아니라 단백질 젤리와 단백질 묵(?), 단백질 패티와 같은 선택할 수 있는 요리 몇 가지를 더 주었더라면 그들은 영영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차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못했을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정답의 범주를 조금 넓혀 놓았기에 아니라고 생각할 뿐 알고 보면 결국 정답이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