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먼저 행복한 아빠
전후에 태어난 아버지 세대는 매우 가부장적인 사회였다. 지금의 잣대로보면 정말 꼰대라고 불릴 만 하지만 나는 그 시절 아버지들을 이해한다. 한편으로는 내가 아빠가 되어 보니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그렇다고 이해한다는 것이 곧 그들과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지 가부장적인 아버지상을 반대한다. 왜 그토록 아버지 세대는 가부장적이어야 했을까. 전쟁은 대다수 남자가 일으킨다. 물론 인류사에는 전쟁을 지휘했던 여성(여왕, 총리 등)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전쟁은 남자들의 권력 투쟁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 권력의 이면에는 늘 경제적 이권이 있었다. 이런 세계사 속의 흐름 속에서 전쟁이 일상이던 시절에는 대다수 국가가 가부장적이었다. 권위적인 통치자는 늘 남성이었고 그 가운데 있던 여성들은 자신이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전쟁을 수단으로 썼을 정도니 결국은 모든 것은 남성성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후 우리나라 역시 남성성이 극에 달했던 시기 국가 재건의 모든 과정에 남성들이 대거 투입되었고 힘이 있는 남성들이 곧 경제의 주체가 되었다. 사실 고대로 올라가도 모계 사회를 구성한 특별한 집단을 제외하면 대다수 수렵, 채집 간에 사냥에 유리한 남성들이 늘 권력을 쥐고 있었다.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졌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킨다는 것이 그 당시에는 꼭 전쟁과 같은 수단으로부터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은 곧 생존과도 직결되었고, 가정을 꼭 군대처럼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 세대들이 가진 보편적인 가부장제를 이해한다. 하지만 꼭 그래야 했을까? 게다가 지금 사회는 더욱이 전쟁일 기피하고 힘에 의한 통치보다는 철학과 가치, 합리성이 필요한 시대다. 잠시나마 트럼프가 포퓰리즘을 들고 마초다운 면모로 미국을 이끌긴 했지만 얼마가지 못했다. 전 세계적으로 권위주의 통치 방식을 가진 지도자가 있는 나라들이 늘 인기가 많은 것은 아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투르키예의 에르도안이 또 한 번 집권하게 된 것은 투르키예의 전통적 가부장제가 아직 유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도 꼭 가부장적일 필요가 없었고 지금은 더욱이 그럴 필요가 없다. 여전히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많은 아버지들의 특징은 보고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제대로 고민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본인이 겪은 성공(혹은 실패)만 옳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방식대로 가야지만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본능에서 기인한 면도 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은 자신의 후손을 번성시키는데만 관심 있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후손을 번성시키는 것은 곧 자신의 사상을 주입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결국 아빠들은 끊임없이 그저 자신의 생각을 가정 내 주입시키기 바쁜 것이다.
과연 그런 아빠들이 행복할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에게 친절하고 싶고 베풀고 싶어 하는 연민의 마음을 가졌다. 그런 면에서 가부장적인 아빠는 진짜 엄하고 자식들이 한심스러워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생존에게 필요하다는 굳건한 믿음 때문인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니 자기도 그렇게 하는 게 즐거울 리 없다. 게다가 그렇게 엄하게 키운 자식들이 훗날 아버지에게 감사하다고 하기보다는 질려버려서 가족 해체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가정 내 폭력도 흔하고, 극단적으로는 자녀 살해 후 자살을 선택하는 아버지까지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자신이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이 마치 유일한 생존 방식인 것처럼 생각하고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랍시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은 이 시대의 슬픈 아버지들의 자화상이다. 아빠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 먼저 행복할 수 있는 아빠여야 한다. 그런 아빠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그 깨달음을 토대로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애초에 아빠가 되기 전에 그것을 깨닫고 결혼하여 아빠가 되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그것이 조금 늦게 깨달아진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자녀를 훈육할 때가 오기 전에는 깨달아야 한다. 다행히 요즘엔 행복하려는 아빠들이 늘어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2022년 통계에 따르면 육아휴직자는 약 13만 명이었는데 이중 아빠 육아휴직자가 약 30%인 3만 8천여 명에 달했다. 이는 꾸준한 증가세로 2021년에 비하면 30%나 증가한 수치다. 제도적인 뒷받침도 있지만 행복하려는 아빠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육아휴직이라는 것이 행복으로 귀결된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가정의 경제권을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아빠라는 인식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자칫 해고당할 두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어 육아휴직을 하는 아빠들이 증가한다는 것은 단순한 제도적 뒷받침만으로는 볼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아빠들의 관점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고민하고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또한 설령 이러한 도전이 실패하더라도 재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의 근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풍부하여 자존감이 높은 아빠들은 무엇을 해도 자신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주도적으로 삶을 살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시각으로는 이러한 아빠들의 행위가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처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정말이지 가장은 죽어라 일해서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구시대적 발상이다. 먹고사는 걱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는지이다. 행복을 선택한 아빠들은 가장으로서 가정의 기조를 행복에 맞추고 가족 구성원들의 행복을 추구한다. 스스로 행복한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아빠들, 이런 가정이 늘어난다면 사회는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