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공간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만 특히나 남자들에게는 공간이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자들 스스로가 공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것은 공간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애초에 아파트 중심의 사고방식이 고착되면서 그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에 대한 자각이 없어서다. 여자들과 다르게 남자들은 관계에 있어서 단절이 너무나 중요한 행복의 요소다. 모든 여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여자들은 보통 관계 속에서 자존감과 행복을 얻는다. 옷가게를 가도 혼자 가는 법 없이 같이 가고 서로 입어보며 상대를 칭찬한다. 그것이 진심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나의 피팅에 대해 언급해 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쇼핑을 하면 여자들은 호객 행위에 자연스럽게 넘어가주고 피팅한 결과물에 입에 마르도록 칭찬을 하면 구매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오죽하면 수많은 옷을 주고 거울을 주지 않으면 그것이 여자들에게 지옥이라는 말을 하는 정도다. (여기서 거울은 곧 반응을 의미한다.) 하지만 남자들에게 호객 행위는 내 물건을 사지 말라는 극렬한 거부행위라고 느껴진다. 남자들은 자신만의 공간, 자신만의 생각, 자신만의 언어가 분명히 필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물건을 살 때 마음껏 보도록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구매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물론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경우가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남녀의 차이점 때문에 오는 공간에 대한 인식 역시 남자에게 있어 확연한 차이가 발생한다.
아파트 중심의 사회가 되면서 남자들은 공간을 잃었다. 그나마 시골 남자들은 농막 같은 것이 있어서 괜찮지만 도시의 남자들은 상당한 부유층이 아니고서야 서재 같은 별도의 방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공간을 소유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안방은 늘 아내의 몫이다. 거실은 모든 가족이 모이는 곳이다. 오히려 아이들이 아이들 방을 소유했다. 이 덕분에 성장하는 남자아이들에게도 있는 방이 아빠한테 없으니 아빠 입장에선 오히려 어른이 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니 삶의 질이 떨어졌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니 결혼도 안 하고 싶고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도 없어질 수 있다. 남자들이 그 공간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관심 가질 필요 없다. 그곳에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게임을 할 수도 있다. 그냥 멍 때리고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남자들에게는 온 세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낸 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이 매우 필요한데 이런 시간은 공간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데 있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간다는 말이 기혼 남성들에게 가장 행복한 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파트라고 하는 건축 구조물의 특성상 남자들이 자신의 공간을 빼앗긴 상황에서 시간 분리를 통해 공간을 획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아주 어린 나이의 남아를 제외한다면 전 연령대의 남성들은 똑같다. 군대에서 용사들에게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고 나서 생긴 현상으로 전화 사용 시간이 되면 용사들이 연병장, 복도 이곳저곳을 어슬렁어슬렁 다니면서 전화 통화를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휴대전화는 세상과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간접적으로 세상과 연결되는 순간 그들에겐 공간이 필요하지만 단체 생활을 하는 군대에서는 공간을 줄 수 없으니 연병장 한가운데에서 어슬렁 거리며 전화를 하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물리적, 심리적 공간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때로는 결혼을 포기하기도 한다. 결혼을 포기한 남자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혼을 통해서 얻는 행복, 아이를 낳아서 얻는 행복이 딱히 자신이 지금 혼자 즐기고 있는 행복보다 더 낫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혼자 즐기는 행복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원하는 시간과 공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여자들에게 행복은 신뢰할 수 있는 관계,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 관계와 같이 타인과 연결된 무엇인가라면 남성들은 무조건 혼자 하고 싶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결혼하고 나서도 혼자 있고 싶은 것이 남자라는 생명체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들도 좋은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모를 리 없다. 그저 그것이 너무 좋은지 알고 있지만 가끔 정말 가끔 혼자 있고 싶은 그때 혼자 있을 수 없음에 대한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인 문제 혹은 배우자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남자들 스스로도 문제가 있다. 먼저 자신이 세상과 어떻게 소통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런 이해의 과정을 성장 과정에서 잘 겪지 못한다. 사춘기의 남성들은 으레 골방에 처박히곤 한다. 그 시기 중요한 배움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역할인데 세상과 단절함으로써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심리학자 에릭슨은 이런 시기를 정체감 대 역할혼미, 친밀감 대 고립감의 시기로 표현했다. 더 나아가서는 생산성 대 침체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악순환인 것은 이때 아빠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세상으로 아들을 끌고 나와서 세상 속 자신의 역할에 대해 이해를 시켜주고, 고립감이 무엇인지, 그 고립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가르쳐줘야 하는데 아빠들도 그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아빠 역시 그렇게 아들을 지도하려면 자신의 공간이 필요한데 그렇지 못했다. 이유야 정말 여럿이 있겠다. 앞서 얘기했던 교육의 문제나, 산업화의 문제, 정책의 문제도 있겠지만 지금부터는 이것을 공간이라고 하는 물리적 환경으로 풀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