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의 비극
아파트가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주거 양식이 된 것은 오래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아파트와 같은 공동 주택 혹은 다세대 주택이 주거지의 표준인 경우는 흔치 않다. 우리나라는 그 비율에 있어서 1위다.(2020년 OECD 통계 기준 75%이며, 2위인 스페인의 경우 66.1%이다. 전 세계는 27% 수준.) 아파트가 표준이 된 이유도 사실 그렇게 기분 좋은 이유는 아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광복 이전 우리나라 표준 주거 형태는 여전히 초가집과 같은 인프라가 전혀 없는 낙후되고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후 일어난 6.25 전쟁으로 전국토가 초토화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인프라라고 할 수 있는 것들 가령, 수도, 전기 등과 같은 것이 생겨났고 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공동주택 중심으로 건설될 수밖에 없었다. 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례 없는 편안한 인프라를 국민이 처음으로 경험해 본 것이 아파트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뇌리에 아파트는 곧 신식 주택이고 편리한 곳이라는 생각이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유럽의 경우는 달랐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여전히 단독주택과 같은 주거 형태를 고집하였다. 이미 그런 형태에서도 인프라가 갖춰진 경우를 경험했기 때문에 인프라를 갖추었냐 마느냐와 같은 1차원적인 생존의 문제가 아닌 내가 주거 공간을 통해 어떤 삶을 누리겠느냐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마치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생긴 문제는 집이라는 것이 가진 오랜 철학적 담론 없이 그저 인프라가 갖춘 편안한 곳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주거 형태는 그 시대, 문화를 대변한다. 우리는 지금도 과거 집터를 발굴하면 그것을 통해 당시 생활상을 엿보곤 하는데 미래 우리 후손들은 높이 솟은 아파트 잔해들을 발견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영 매력이 없어 보인다. 마치 멋은 없지만 편하기만 한 옷이 그 시대의 유산이 되어버린 것과 같다. 옷이라는 것이 편안함도 물론 중요하지만 TPO에 따라 때로는 문화적인 배경을 내포하기도 해야 하는데 그냥 온 국민이 몸빼바지를 입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요즘 아파트들은 숲 조경 등을 통해 세련된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은 공동의 소유이고 내가 나의 철학대로 꾸밀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오죽하면 공용 정원에 수영장을 설치했다가 몰매를 맞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아파트 이전의 전통 가구 형태는 주로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측, 중앙에 방이 있고 한편에 주방이 있었다. 이 주방의 아궁이는 각 방으로 열기를 보내주는 온돌로 연결되어 있었고, 마당 한편에 변소와 사랑방이 있었다. 재산의 규모에 따라 방의 개수는 더 많아지고 집의 형태도 일자형에서 ㄱ자 혹은 ㄷ자 형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뼈대가 되는 기본 원리, 이것이 곧 당대의 철학이고 문화였는데 거의 모든 주거 형태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화장실을 분리시켰다는 것, 두 번째는 사랑방을 분리시켰다는 것, 세 번째는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마루를 지나 방으로 들어가는 형태였다는 것이다. 가부장적인 가정 형태가 기본이었던 전통 시대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 아니라면 늘 안방이라고 하는 곳은 아버지가 거주하는 곳으로 집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했다. 양반들이 사는 기와집의 경우에는 서재까지 갖추었다. 즉 집의 가장 어른이 되는 남자 어른(보통 아버지)은 늘 개인 공간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개인 공간으로 향하는 문의 개수, 공간의 넓이가 곧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왕이 집무를 보았다는 근정전을 생각해 보면 널찍한 공간에 덩그러니 높이 솟은 왕의 의자가 있는 모습이 권력의 상징으로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아파트로 주거형태가 바뀌면서 중요한 몇 가지를 잃었다. 첫째는 아버지의 공간이다. 방의 개수가 무한정일 수 없는 아파트 특성상 안방은 이제 어머니의 차지가 되었다. 거실은 가족 모두의 공간이다. 그나마 80~90년대에는 아버지가 거실을 차지하고 리모컨을 차지하여 거실에서 자신만의 권력을 누렸다지만 요즘 아빠들은 그렇지도 못하다. 게다가 주방을 오픈하는 형태로 바뀌면서 주방과 거실이 이어지는 공간마저 엄마들의 차지가 되었다. 아일랜드 테이블 같은 것이 유행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열린 공간에서 접대하는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아파트에서는 아빠가 있을 공간이 없다. 두 번째는 정원(마당)의 상실이다. 외부에서 바로 집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당이라고 하는 공간을 거쳐야 했고 그 공간은 바깥과 안의 완충지대로서 역할을 했다. 문화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예를 들면 널뛰기가 그것이다. 더불어 이곳에서는 풍류를 읊기도 했고, 사색의 공간이 되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게 없다. 아파트는 얇은 철문 하나로 내외부를 분리했고 완충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졌다.
공간은 권력이다. 여기서의 권력은 단순히 권세를 누리는 나쁜 의미로만 쓰이지 않는다. 중심이고 무게이다. 가정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권위의 균형이 필요하다. 너무 권위주의적인 아빠도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권위가 전혀 없어 아이들이 엇나가는데 통제가 불가능하다면 그것 또한 옳다고는 할 수 없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를 통해서 친구 같은 부모가 되어준다면 그것도 매우 좋은 현상일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완벽한 것이 아니고서야(게다가 애가 어른과 똑같이 자제력을 갖지 않고서야) 이런 일은 쉽지 않다. 결국 어느 순간에는 통제를 해야 하는데 그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은 인격적으로, 전문적으로, 사회 규범적으로 발현된다. 그리고 공간은 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역할을 해준다. 아파트는 그런 공간을 모두 없애버림으로써 아버지의 권력이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 좁은 안방에는 침대가 들어서면 끝이다. 이런 공간에 화장대까지 배치되면 아빠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 결국 거실로 나온다. 거실은 가족 모두의 공간이다. 아빠가 독점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인격적 권위를 상실케 한다. 권위주의적인 아빠로 비친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어떤 전문성을 발휘할만한 모습을 보이기 쉽지 않다. 책을 읽는다고 하여도 한창 뛰어놀어야 할 아이들에게 무조건 앉아서 책만 읽으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주방과 연결된 거실의 구조 상 오히려 그곳은 엄마의 공간에 가깝다. 이 시대 아파트에 거주하는 아빠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결국 아빠들은 바깥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아빠들이 접할 수 있는 것은 고매한 풍류를 읊는 취미가 아니라 술, 도박과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