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남단 제주의 외로운 태풍 맞이.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까지의 거리 약 80km. 차로는 한 시간 정도겠지만 배와 비행기로만 이동 가능하며 그마저도 오늘처럼 태풍의 영향권에 있는 날은 이동이 불가능해 완전히 고립되어 버리는 외로운 섬. 120만 년 전 처음 태어나 한반도 남쪽 태풍의 길목을 묵묵히 지켜온 바로 그 섬.
8호 태풍 '바비'가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바비는 베트남 북부에 있는 산맥 이름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기준 제주 남남서쪽 약 3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약 15km/h의 속도로 제주를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상 경로는 제주를 통과하여 한반도 서쪽을 지나 북한을 지난다고 합니다. 어제부터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마당을 정리했습니다. 바람에 날릴만한 것들은 모두 창고 넣거나 뒤집어 두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집은 후박나무와 동백나무, 올레로 둘러싸여 있어서 태풍이 와도 막아줄 든든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다른 곳에서 비산물이 날아와서 행여나 커다란 창문을 깨뜨리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제주도는 한반도 남단 하필이면 모든 태풍의 길목에 위치해있습니다. 육지에 있을 땐 몰랐습니다. 뉴스를 보면 제주에 가장 먼저 태풍이 도착했다는 소식 정도야 당연히 남쪽에 있으니 그렇겠지 정도로만 흘려들었습니다. 제주에 와서 알게 된 것은 우리나라를 지나는 모든 태풍은 반드시 제주에 영향을 주고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지난 120만 년 동안 제주는 이곳에 홀로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며 한반도로 향하는 태풍을 먼저 맨 몸으로 막아왔습니다. 제주를 지나며 태풍이 약해지는 경우도 많고 서해나 동해상으로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제주는 항상 태풍의 영향권 내에 있어왔습니다. 한반도라고 하면 제주와 같은 부속도서를 모두 포함하는데 우리나라가 그래도 꽤 넓은지 서해 쪽에 상륙한 태풍은 태백산맥을 넘지 못해 동해권이 안정적일 때가 있고 동해 쪽으로 빠지면 서해 쪽이 안정적일 때가 있고 대다수 국민들은 수도 '서울'이 어떻게 될지가 관심일 때 제주도는 서로 가나 동으로 가나 태풍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곳 신천리는 표선면과 성산읍의 경계선 즈음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걸어서 7분 정도만 나가면 바다를 볼 수 있어 더 늦기 전에 올라오는 태풍이 어떨지 궁금한 마음에 바다로 차를 몰고 나가봅니다. 인터넷 유머 사이트에서 남자들이 여성보다 평균 수명이 짧은 이유라는 게시글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데 저 역시 그런 위험한 행동을 좋아하는 어쩔 수 없이 평균 수명 짧을지 모르는 철없는 남자인가 봅니다. 목에 카메라까지 걸고 말이죠. 바다에 나가보니 제가 평소에 보던 그 바다가 아닙니다. 제가 앉아서 해를 바라보며 명상을 했던 일명 '명상 바위'도 물에 잠겼습니다. 우리 집 앞바다에서 가장 높이 솟은 바위 절벽은 접근 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파도가 연신 들이치고 있습니다. '집채만 한 파도'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정말 파도가 집채만 합니다. 물보라는 하얗게 일다 못해 바다에 누가 우유를 잔뜩 뿌리고 휘휘 저은 것처럼 하얀 거품이 일었습니다.
제주는 참으로 외롭겠구나 싶습니다. 이 무서운 파도를 홀로 마주하고 서있어야 하는데 뉴스에서는 아마도 '제주가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섰고 가까운 바다에서도 3~4m의 높은 파도가 일고 있습니다.' 정도로 이 상황을 묘사할 테니까요. 남은 시간은 육지의 태풍 피해가 없도록 당부하는 기자의 멘트로 가득 찰 것입니다. 인구 70만이 채 되지 않는 제주는 평상시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깨닫습니다. 국내 최고의 여행지라고 하지만 여행지라는 것은 마치 간식과 같아서 '오늘 삼시세끼 밥 뭐 먹지?'의 고민은 많이 하지만 '오늘 간식 뭐 먹지?' 고민이 상대적으로 짧은 것처럼 말이죠. 그래도 제주는 외롭지 않습니다. 여전히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힘써 일하고 있습니다. 등대는 오늘도 불이 켜집니다. 포구에 결박된 배들은 옹기종기 모여 이 태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이 험한 날씨에 호기심을 갖는 저 같은 사람도 많을 테지요.
이 태풍은 아마도 오늘 밤부터 내일 새벽이 절정일 듯합니다. 오늘 밤에 자려고 누우면 휘융휘융대는 바람소리와 어렴풋이 나부끼는 야자수 나뭇잎 그림자가 방안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천둥번개와 비바람까지 몰아친다면 꽤나 시끄러운 밤이 되겠지요. 부디 안전하게 이 태풍이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미리 정리해뒀다곤 하지만 태풍의 위력이 워낙 세서 가만히 서있기 조차 어려운 수준이라고 하니 행여나 꽃나무가 꺾이진 않을지 한편으로는 걱정이 됩니다. 마당 옆엔 잘 자라고 있는 무화과나무가 있고 곧 과실을 맛볼 수 있을 텐데... 제주 전체의 농가에 피해가 없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지난번 50여 일 계속된 장마로 바다로 조업하러 나가질 못해 한동안 어려웠던 수산업계도 이번 태풍으로 또 한 동안 어렵겠지요. 부디 피해 없이 잘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어둑해지기도 해서 들어갈까 하고 발을 돌리는 순간 세찬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가지 말라고 잡는 건지 아니면 빨리 가라고 등 떠미는 건지 모를 일입니다. 바람이 더 거칠어 서있기도 힘듭니다. 자동차 문을 열려고 하는데 바람이 자꾸 닫으려고 해 한동안 실랑이를 벌입니다. 차에 무사히 올라타니 안전하다 못해 아늑하게 느껴집니다. 이 작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바깥과 안의 공기가 이렇게나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바다를 한 번 더 보고 급하게 차를 몰아 집으로 향합니다. 바다에서 불과 1km 남짓 떨어진 집인데 이곳은 비가 오질 않습니다. 하지만 아까랑 구름의 모습이 사뭇 다릅니다. 이제 정말 태풍이 오려나 봅니다. 문득 이번 주 놀러 오기로 했던 후배가 코로나 19로 인해서 휴가가 취소돼 못 오게 된 것이 되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주도는 코로나 19로부터 상대적으로 잘 보호받고 있습니다. 지역사회 감염이 아직은 없고 현재 기준 33명의 확진자가 있지만 모두 외부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전염된 사례입니다. 하지만 자연재해에 의한 피해는 제주가 가장 먼저 맞이하곤 합니다. 지리적인 위치가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지면서 동시에 지정학적으로는 한반도에서 태평양으로 뻗어가는 길목에 위치해 제주 복합미항과 같은 군사 전략 요충지를 필요로 하고 기후적으로는 아열대면서 태풍의 길목이 되기도 하는 걸 보면 제주도 참 기구한 운명의 섬입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제주는 잘 이겨낼 것입니다. 제주는 강인한 섬입니다. 또 제주를 닮은 해녀들도 있습니다. 오랜 시간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제주 토박이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제주도민이 된 많은 이주민들이 이곳의 척박한 환경에서 풍요로움을 찾아내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일 년 중 여름휴가 때나 한 번 생각하는 섬 일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터전을 잡은 사람들에게는 함께 살아가는 운명공동체입니다.
지금 제주는 태풍 '바비'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육지가 쿼터백 역할을 하며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때 제주는 센터, 가드 역할을 하며 묵묵히 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먼 곳에서 태풍을 안전하게 보내라는 연락에 제주는 외롭지 않다고 느낍니다. 육지에서 응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제주는 또 한 번 이 어려움을 이겨낼 것입니다. 순간 최대 풍속이 50~60m에 달할 것이라고 하는 '바비'지만 제주는 이곳에 서서 그 바람 약해지도록 버틸 것입니다. 이 태풍이 지나간 후 우리 모두 뙤약볕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제주 바닷가에서 다시 만나길 기대합니다. 모두 안전하시길 바랍니다!